오피니언 시선 2035

파면의 ㅍ만 들어도 '사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이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 현 사회 2부 기자

이 현 사회 2부 기자

2012년 12월 11일. 나의 ‘칼퇴근’ 시도는 10리(4㎞)도 못 가 미수에 그쳤다. 캡(팀장)의 전화를 받고 서울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로 달려갔다. 국정원 직원 김모씨의 집이었다. 민주통합당 의원들과 기자, 경찰이 얽혀 오피스텔 복도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렇게 며칠 밤낮을 역삼동 오피스텔과 수서경찰서 로비에서 보냈다. 경찰은 일주일 만에 “국정원 직원이 단 게시글이나 댓글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미심쩍은 결론이었지만 퍼즐 조각 몇 개만으로 ‘큰 그림’을 예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뒤 박근혜 후보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2014년 1월 1일. 나는 장례식장으로 출근했다. 전날 서울역 앞 고가도로에 “박근혜 사퇴” “특검 실시”라 써진 플래카드를 걸고 분신한 이모씨가 한강성심병원에서 숨졌다. 이씨의 수첩에는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는 정부에 대한 불만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장례식장 앞에서 만난 고인의 형은 눈시울을 붉히며 “원인을 좀 알고 싶어요. 왜 그랬는가”라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씨가 한 달 전 보험에 가입한 사실이 있다며 “빚과 어머니 병환 등을 이유로 분신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이 말한 보험은 운전자 보험이었다.

이씨가 서울역 고가도로에 내걸었던 플래카드 문구는 3년 만에 현실이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퇴하지 않고 버티다 지난 10일 탄핵당했다. 특검 수사도 지난달 마무리됐다. 5년 남짓한 나의 취재 경력은 납득이 되지 않는 기묘한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현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대개 나라에 화가 잔뜩 나 있었지만 당국은 늘 정반대의 이야기만 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시민들의 불만은 ‘의혹’으로, 국가기관의 발표는 ‘확인된 사실’로 쓸 수밖에 없었다.

2014년 4월 16일. 해가 저물어 가는 진도 팽목항에 도착하자마자 부두를 서성대는 탑승객 가족에게 물었다. 가족들에게는 뭐라도 연락이 갔겠지 싶어서. “지금 뭐 어떻게 돼 간대요?” 나의 질문은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기자세요? 혹시 여기 누가 현장 책임자인지 아세요?” 한 달 후 박 대통령은 사고 당일 무엇을 했는지 밝히는 대신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해 버렸고, 언론은 세월호 실소유주 유병언의 흔적을 경쟁적으로 쫓고 있었다. 유병언의 시체는 이 참사의 이유가 되진 못했다.

“대통령 박근혜를 파….” 와아아, ‘파면’ 두 글자를 다 발음하기도 전에 환호가 터졌다. 몇 년째 이름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사람 앞에 명의가 나타나 “당신의 병명은 이것이오” 진단을 내려 준 것 같은 기쁨이랄까. ‘거봐 우리 대통령이 이상한 거 맞았잖아!’ 마주치는 눈동자마다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 일은 분명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 현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