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헌법 위배 행위 적극·반복적, 복귀해도 개선 안돼’ 판단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522호 면

[포스트 탄핵 정국] 총 89쪽 헌재 탄핵 결정문 분석

대통령 탄핵 결정문.

대통령 탄핵 결정문.

지난 10일 오전 11시 헌법재판소.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이정미(55)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18쪽 분량의 ‘선고 요지’를 읽어 내려갔다. 여러 명의 헌법연구관이 이날 새벽까지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초안을 다듬은 문서다. 직접 문서를 낭독해야 하는 이 권한대행은 초안에 여러 차례 가필(加筆)을 하며 선고 요지를 완성했다. ‘화합’ ‘치유의 길’ ‘헌법’ 등의 단어를 요지문에 추가했으며 평소 자신의 말이 빠른 점을 감안해 의도적으로 천천히 읽기 위해 쉬어가는 부분도 표시했다. 헌재가 공개한 선고 요지문과 이 권한대행이 실제 심판정에서 낭독한 내용이 일부분 차이가 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이 권한대행과 헌재가 역사적 결정을 앞두고 얼마나 고심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재판관 92일간의 고민 흔적 담겨 #말 빠른 이정미, 일부러 천천히 읽어 #‘대통령 권한 남용’에 16쪽 할애 #탄핵 인용 결정에 핵심 사유로 설명 #첫 장에는 ‘2017.3.10 11:21’ 표기 #국가원수 파면 시점도 명확히 해

헌재는 선고기일 종료 후 3시간쯤 뒤 결정문을 공개했다. 전체 89쪽 분량의 결정문에는 국회의 13가지 소추 사유와 대통령 측의 반박 의견에 대해 재판관들이 92일간 치열하게 고민해 내린 결론이 담겨 있다.

대통령 권한행사도 법률에 근거해야

헌재가 대통령 탄핵을 결정한 사유는 ‘대통령 권한남용’과 ‘사인의 국정 개입 허용’ 두 가지다. 결정문 20쪽부터 47쪽까지 기술된 부분이다. 대통령 권한남용 부분에 대한 소추 사유 요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774억원의 출연금을 내도록 기업에 강요하고 ▶최순실씨 지인이 운영하는 KD코퍼레이션이 현대차에 납품할 수 있게 도와줬으며 ▶최씨 회사인 플레이그라운드가 광고를 수주할 수 있게 지원했다는 내용이다. 사인의 국정 개입 허용 부분은 ▶최순실씨에게 연설문 등 문건을 유출했고 ▶최씨가 추천하는 인사를 공직에 임명한 점이다.

헌재는 이 같은 소추 사유 중 대통령 권한남용 부분에 비중을 두고 판단했다. 결정문에서 국정 개입을 설명하는 부분은 6쪽 분량으로 간략하게 넘어갔지만 권한남용 부분은 16쪽에 걸쳐 방대한 사례들을 제시하며 설명했다. 국정 개입에 대해선 사례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최씨의 개인적 비리를 대통령이 지원해줬다는 권한남용 부분이 탄핵 결정에 핵심 사유였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헌재는 대통령의 권한남용이 공익실현 의무를 위반하고 기업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통령은 사기업으로부터 재원을 마련해 미르·K스포츠를 설립하도록 지시했고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기업들에 출연을 요구했다. …(중략)… 그 결과 최순실이 두 재단을 장악했고 자신이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플레이그라운드 등을 통해 재단을 이권 창출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일련의 행위는 최순실씨 등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으로서 지위와 권한을 남용한 것이다. …(중략)… (대통령의 기업들에 대한 재단 출연 요구는) 단순한 의견 제시나 권고가 아니라 사실상 구속력 있는 행위라고 봐야 한다.”(결정문 43~44쪽)

이에 대해 대통령 측은 국정과제 수행을 위한 것이라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공식 절차’를 통한 국정 운영은 문제가 있다는 취지에서다.

“문화융성이라는 국정과제 수행을 위해 미르·K스포츠 설립이 필요했다면 공권력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기준과 요건을 법률로 정하고 공개적으로 재단을 설립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비밀리에 대통령의 권한을 이용해 기업으로 하여금 재단법인에 출연하도록 한 행위는 기업의 재산권 및 경영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다.”(46쪽)

헌재는 이 밖에 공무원 임면권 남용 여부, 언론의 자유 침해, 생명권 보호의무 위반 사유는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통령 거짓말’ 법 위반 중대성 평가에 고려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의 두 가지 헌법·법률 위배 사안이 그를 대통령직에서 파면할 만큼 중대하다고 봤다. 위배 행위들이 한 차례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반복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사적 용도로 남용했다. 결과적으로 최씨의 사익 추구를 도와준 것으로서 적극적·반복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대통령 지위를 이용하거나 국가의 기관과 조직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그 법 위반의 정도가 매우 엄중하다. …(중략)… 이는 대의민주제의 원리와 법치주의의 정신을 훼손한 행위로서 대통령으로서의 공익실현 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한 것이다.”(55~56쪽)

탄핵 결정엔 박 전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한다 해도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고려됐다. ▶최씨의 국정 개입을 허용하면서 이를 철저히 비밀에 부친 점 ▶언론 보도로 문제점이 드러났을 때 부인하고 의혹 제기 행위만을 비난한 점 ▶대국민 담화에서 한 진상규명 협조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점 등이다. 헌재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거짓말을 한 부분들은 탄핵 사유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다만 헌법과 법률 위반 사실이 중대한지 판단하는 하나의 정상요소로는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탄핵심판 결정문 첫 장은 여느 일반 헌법사건 결정문과는 조금 달랐다. 선고일시란에 ‘2017.3.10 11:21’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통상 날짜만 적지만 이번 탄핵심판에서는 끝나는 시간을 분 단위까지 표기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의 파면 시점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한 조치였다. 만약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국가원수로서 권한을 긴박하게 행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누가 권한이 있느냐를 명확하게 정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는 법원이 기업파산 사건에서 언제 기업이 파산됐는지 분 단위까지 쓰게 돼 있는 규정을 참고한 것이다.

또 대통령의 파면 시점을 두고서도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정미 권한대행이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말한 11시21분인지 아니면 1분여간 보충의견을 읽은 뒤 “이것으로 선고를 마칩니다”라고 한 22분인지를 두고서다. 논쟁 끝에 주문을 다 읽은 오전 11시21분이 효력이 생기는 시점으로 정해졌다.

관련기사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