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 1등 신경 쓰다 느슨해진 것 못 느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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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밤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이건희 삼성 회장이 휠체어를 탄 채 입국장을 나오고 있다. 김성룡 기자

"국제 경쟁이 심해 상품 1등 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삼성이) 국내에서 비대해져서 느슨해져 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5개월간의 장기 해외 체류를 마치고 4일 저녁 귀국한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일성(一聲)이다. "작년 중반쯤이라도 (느슨해져 가는 것을) 느껴 다행"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헝클어졌던 삼성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주춤했던 개혁의 고삐도 다시 틀어쥐겠다는 다짐으로 보인다.

삼성 관계자는 "환율 하락과 국제유가 상승 등 급변하는 경영환경을 직접 챙기면서 글로벌 초일류 기업 도약이라는 비전 달성에 매진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장이 해외에 머무는 동안 삼성은 각종 악재에 시달렸다. 안기부 불법 도청 논란,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개정 움직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증여 논란, 사회 일각의 반(反)삼성 분위기 등으로 삼성은 곤경에 빠졌다. 대외적으로는 '잘나가는' 삼성의 기세를 꺾기 위해 미국.일본 등 해외 경쟁 업체가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등 견제 움직임도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환율 하락과 고유가 등 경영환경도 나빠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속에서 이 회장은 국내에 들어와 직접 챙겨야하겠다는 판단을 내린 듯하다.

해외 체류 중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을 2주일에 한 번꼴로 만나 주요 경영 현안을 보고받았지만 한계를 느꼈을 것이라는 게 삼성 주변의 분석이다. 결국 삼성을 둘러싼 모든 위기와 난국을 풀어나갈 주역은 이 회장 본인밖에 없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다는 설명이다. 장기 해외 체류로 신변에 관한 억측이 있었던 것도 부담스러웠던 부분이다. 4일 귀국길의 이 회장은 비록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이용하긴 했으나 건강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의 귀국 결정은 삼성을 둘러싼 각종 현안에 대해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이 언급한 '비대해지고 느슨해진 삼성'과 관련, 일각에서는 구조조정에 착수할 것이라는 등의 관측이 나오고 있으나 삼성에서는 해석이 좀 다르다. 연초에 사장.임원진 인사를 마치면 이변이 없는 한 계속 맡기는 이 회장의 경영 스타일에 비춰볼 때 조직의 안정을 흔들 만한 결정은 나오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의 언급은 조직 내부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기보다는 삼성이 경제 기여도에 걸맞은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고민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연초 신년사를 통해 '상생 경영'과 '사회와의 의사소통'을 강조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삼성 주변에선 사회 공헌 및 양극화 문제 해소 등과 관련한 획기적 대책이 나올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 회장은 이날 공항에서 "한국에 오니 좋다"고 말했다. 애초에는 지난달 귀국할 계획이었으나 뜻밖의 다리 부상으로 귀국시기가 늦춰졌다는 후문이다. 이 회장은 부상 때문에 8일부터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리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는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다.

한편 검찰은 에버랜드 CB 증여 사건과 관련, 이 회장을 당장 조사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현재 삼성 계열사 회계 자료 조사가 덜 끝나 소환 조사할 단계가 아니다"며 "주요 경제인이라 출국금지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현상.이희성 기자 <leehs@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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