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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어쨌든 뒤끝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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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긴 겨울이었다. 아슬아슬했다. 기세등등한 촛불 행진에 숨죽였던 기성세대가 일대 궐기해 서울광장을 태극기 물결로 덮었다. 혁명과 반혁명의 시위대가 서울 도심을 교란한 것은 해방 공간 신탁 찬반 세력이 맞붙은 이후 처음일 것이다. 태극기 부대 역시 민주와 법치를 외쳤는데 광화문광장에서 울려퍼진 시민주권과 뒤섞여 대한민국은 둥둥 떠내려갔다. 서울광장의 구호는 그들의 경륜에 어울리지 않게 거칠었고, 말과 행동엔 적의와 경고가 서려 있었다. 촛불의 분노와 태극기의 적의가 뒤섞여 민주공화국의 기초가 흔들렸다. 한반도 상공에 검은 적란운이 가득 몰려왔다.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모두 엄청난 비용을 치를 것 #그 공통점은 ‘작렬하는 뒤끝’ #예견되는 칼바람·피바람 숙정 #그 비용은 국민이 지불한다

아슬아슬한 겨울이 지나고 조마조마한 봄이 왔다. 꽃망울 터질 조바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만, 한쪽 진영을 완전 소개(疏開)해 다른 영토로 투항하라는 운명적 결단이 곧 내려질 것이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1주일 남짓, 평의(評議)에 돌입한 헌재 굴뚝에서 어떤 연기가 피어오를까.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처럼 검은 연기에 와인 한 잔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리거나 흰 연기에 교황 탄생을 환호하는 축포를 터뜨릴 그럴 계제가 아니다. 흰 연기(인용)가 피어오르든, 검은 연기(기각)가 새어나오든 한쪽 광장은 겨우내 달궜던 분노의 화기를 연소시킬 출구가 막힌다. 굴복할 진영의 분노를 어찌할 것인가. 자제력이 문제다. 법치는 승복이 생명이지만 한껏 끓어오른 화기가 자제력의 벽을 뚫으면 파열이고, 담장을 넘으면 충돌이다. 그 결과는 자해일 수도, 가해일 수도 있다.

인용과 기각, 두 개의 시나리오는 모두 엄청난 비용을 치를 것이다. 탄핵사태가 시작된 때부터 이미 고지서가 우리에게 배달되었다. 고지서 발행자도 국민이고, 납부자도 국민이다. 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한 지도자와 무능한 정치를 끝내는 비용이고(인용), 그런 정치를 한동안 다시 연장해야 할 비용이다(기각). 두 동강 난 나라는 이미 두 개의 광장이 지불한 기본입장료에 불과하다. 무엇을 더 지불하게 될까?

인용 시: “대세론에 별다른 돌발 계기가 없다면 문재인 등극은 명약관화한 사실이고, 정권은 민주당으로 넘어간다. 보수의 대실패이니 당연한 결과다. 10년을 와신상담 기다렸다. 진보정권답게 칼바람이 몰아친다. 공공기관 수장들은 모두 갈리고, 보수에 충성했던 고위관료 역시 추풍낙엽이다. 특검의 수사기록은 칼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지정해 준다. 검찰, 경찰, 국정원, 감사원 등 사정기관을 혁혁한 진보 장수들이 접수해 10년 동안 눌러놨던 대형 비리와 정치적 미제사건을 낱낱이 밝힐 것이다. 검찰의 수사 캐비닛이 열리는 순간, 공항은 이민 갈 사람들로 붐빈다. 국정원 댓글사건, 고(故) 노무현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간 세력들이 줄줄이 포승줄에 묶일 것이다. 재벌은 한동안 엄동설한을 견뎌야 하고, 민주노총을 위시해 강성노조가 통치 깊숙이 개입한다. 종부세·법인세가 올라가고, 복지공세가 서민을 즐겁게 한다. 칼바람, 증세, 복지는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터에 그걸 다투느라 국회는 개업과 휴업을 반복한다.”

기각 시: “이건 피바람이다. 특검이 단죄했던 죄인들은 모두 복권된다. 박정희와 박근혜는 성인 반열에 오른다. 보란 듯 구치소를 걸어나오는 최순실은 역모죄로 수감되는 고영태 일당과 엇갈린다. 특검의 복덩이 장시호는 특수 괘씸죄로 독방 신세. 김기춘은 청와대 특별고문, 우병우는 검찰총장으로 복귀한다. 우병우는 특검에 오랏줄을 날리고, 특검에 줄선 검사들을 솎아낸다. JTBC는 폐쇄 위기에 몰리고 언론방송에서 깨춤을 췄던 교수와 방송인들은 블랙리스트 행(行). 문화계 그것보다 두 배는 길다. 출국금지령이 내려져 공항은 한산하다. 태극기집회 집행부는 국가유공훈장, 태극기시위에 안 간 고위 공직자들은 유배형이다. 시민혁명 운운했던 야당 대선주자들은 감찰 대상. 국회가 사생결단 막겠지만 그래봤자 정보정치는 누구도 막지 못한다.”

두 시나리오의 공통점은 ‘작렬하는 뒤끝’이다. 칼바람이든, 피바람이든 일대 숙정은 예견된 바다. 모두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그 비용은 국민이 지불한다.

국가의 개점휴업이 반년을 넘겼다. 보이지 않는 손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식 중인데, 국가의 운(運)을 고갈시키는 무서운 통첩이 속속 발령되고 있다. 사드 보복에 나선 시진핑은 한국 여행 금지령을 내렸다. 한·중 관계가 얼어붙었다. 트럼프는 아예 북한 예방타격을 조준하고 있고, 한·미 FTA 재협상을 만지작거린다. 예방타격이란 불시에 북핵 시설을 포격하는 것이다. 한반도는 전쟁가능국 1순위로 등극했다. 발 빠르게 움직인 아베는 느긋하다. 패착에 빠진 한국호(號)는 표류 중, 정권이 바뀌면 강경 친노그룹이 트럼프를 살짝 미치게 만들지 모른다. 칼바람, 피바람이 ‘정상 국가’를 회복하는 비용이라면 기꺼이 치르겠는데, 그 어느 것이든 ‘뒤끝 정치’가 분단국 남한을 또 분단할까 두렵다.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리스트·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