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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지 못한 정권 왜 안 달라지나 … 그 뿌리 캐 봤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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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타인에 대한 공감과 유대의 소중함을 강조해온 소설가 조해진씨. 더 묵직하고 정교해진 소설집 『빛의 호위』를 출간했다. “타인과 유대를 맺는 순간이 결국 사람을 살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사진 조문규 기자]

타인에 대한 공감과 유대의 소중함을 강조해온 소설가 조해진씨. 더 묵직하고 정교해진 소설집 『빛의 호위』를 출간했다. “타인과 유대를 맺는 순간이 결국 사람을 살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사진 조문규 기자]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분신자살한 몇 달 후인 1971년 늦봄. 착잡한 심정이던 재일동포 유학생 서군(君)은 청계천변의 한 레코드 상점을 찾는다. 정신이 쏙 빠질 만큼 아름다운 음악에 이끌려서다. 상점을 지키던 여고생 점원과 친해져 일요일 오후 국수도 함께 먹으러 간다. 하지만 시절을 잊게 하는 예술과 풋사랑의 지복(至福)은 오래 가지 못한다. 당시로는 금기인, 조총련과 접촉한 친구를 묵인했다는 죄로 이듬해 2월 사복차림 사내들에게 끌려가면서다.

새 소설집 『빛의 호위』 펴낸 조해진 #동백림 사건, 유학생 간첩단 소재로 #국가폭력 고발, 타인의 고통 보듬어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진정한 유대”

소설가 조해진(41)씨의 새 소설집 『빛의 호위』(창비·사진)에 실린 단편 ‘사물과의 작별’의 내용 일부다. 소설은 서군과 여고생 점원과의 눈물겨운 러브스토리를 전면에 내세운다. 하지만 현대사에 웬만큼 관심 있는 독자라면 서군이 71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인 서승·서준식 형제의 분신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의 국가 폭력 고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동쪽 伯의 숲’은 67년 동백림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윤이상·천상병 등이 고통을 당한, 이번에는 독일이 배경인 유학생 간첩단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제목 ‘동쪽 伯의 숲’이 동베를린을 한자 음차한 옛 표기 ‘동백림(東伯林)’을 풀어쓴 것이라는 점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조씨는 그간 집요하리만치 우리 안의 타자나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왔다. 그의 소설 인물사전을 채운 건 주로 탈북 유랑인(장편 『로기완을 만났다』), 노숙자나 동성애자(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같은 이들이었다.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타자의 아픔에 눈물 흘리는,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윤리적 기획을 소설 안에서 실천하다 보니 연대와 공감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물론 이 모든 노력은 동시대의 비극이라는 시간적 테두리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조씨가 이번 소설집에서는 과거의 비극에 눈을 돌렸다. 지난달 28일. 조씨는 “요즘 시대가 너무도 이상한 시대이다 보니 내 소설에 변화가 온 것 같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정의롭지 못한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는데 바뀌지 않았고, 바꾸려던 사람들이 오히려 피해 입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 나라,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생겨먹었나 궁금해져 과거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사물과의 작별’ 같은 작품을 쓰게 됐다”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조씨가 고발 대상을 원색 비난하는 건 아니다. 독자로 하여금 긴 우회로를 돌아 현실 각성에 이르도록 하는, 지극히 문학적인 방식이 여전히 그의 보루다.

대표적인 방법이 복잡한 플롯 설계다. 가령 표제작인 ‘빛의 호위’는 나치 치하 홀로코스트의 비극과 21세기 중동 분쟁의 애꿎은 희생자, 소설 화자의 초등학교 친구이자 다큐 사진가인 권은이 겪은 유년의 비극, 세 시간대를 부지런히 오간다. 미로처럼 꼬인 관계와 인연, 각자의 인간적 진실이 책을 앞뒤로 뒤적이며 집중해 읽을 때 비로소 강렬한 빛을 발한다.

맨 마지막에 실린 2015년작 ‘작은 사람들의 노래’는 조선소 안전사고 수습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비정규직 용접공의 이야기다. 소설의 화자인 균은 보육원생 시절 자신들의 도덕적 허영을 위해 위문 공연을 오곤 했던 주부 성가대원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조씨는 뜻밖에 “세월호 사건의 지지부진한 뒷수습이 계기가 돼 쓴 작품”이라고 했다. 불과 1년 전쯤 발생한 참사의 아픔을 쉽게 망각하는 세태를 성가대원에 은근히 투영했다는 얘기였다.

결국 남는 건 유대와 공감이었다. 조씨는 “타인과 진정한 유대를 맺는 순간이 사람을 살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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