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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공동번영에 진력한「철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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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나야마」(도산가관)회장과의 교분은 어언 30년 가까이된다. 사업인연으로 친교를 맺게 되었지만 수십년동안 국경을 초월하는 정의와 신의로 자별한 교우관계가 되었다. 지난해 정초엔 일본NHK와 KBS가 마련한 신년특집대담에도 함께 출연해 새해 국제경제를 전망하는 담론을 한 일도 있었다.
그는 작년 5월「재계총리」로 불리는 일본 경단련회장직을「사이토」회장에게 넘겨 주고 만년을 좀 유유자적하며 보낼 계획이었다.
이제 한 여름도 지나고 청명한 날씨와 함께 다시 만나면 골프도 치고 담소도 나눌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만 부음을 먼저 듣게 되었다.
「이나야마」회장은 우리나라 조야에서도 많이 알려진 인물이지만 한일경제협력의 막후에서음으로 양으로 공헌한바는 실로 지대하다.
1960년대만해도 우리나라는 해마다 극심한 비료부족을 겪으며 귀중한 외화를 비료수입에 쓰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농업을 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비료공장 하나 제대로 없었다. 뒤늦게 정부는 비료공장 건설에 착안하고 그 책임을 나에게 맡겼다.
1963년 나는 33만t 규모의 세계최대 단일비료공장건설계획서를 들고 일본에서 유수한 기업인들과 접촉을 시작했다.
당시「미쓰이」(삼정)물산의「미즈카미」(수상달삼)사장, 고베(신호) 제강「도시마」(외도) 사장, 미쓰비시 (삼능) 상사의「후지노」(등야) 회장이 함께한 자리에서「이나야마」(당시 팔번제철)사장이 열변을 토했던 일은 지금도 잊지않고 있다.
나는 정부로부터 비료공장 건설을 의뢰받은 사실을 밝히고『일본의 플랜트를 택할지, 미국이나 유럽의 플랜트를 해야할지, 이것은 오직 여러분의 협조여하에 달렸다』고 말했다. 「이나야마」회장은 이때 매우 놀라면서『우리가 최대한으로 협력할테니 일본에 맡겨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일본의 플랜트는 구미의 경우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거리가 가까와서 아프터 서비스도 편리하다』고 말하면서『이런 실리조건외에도 일본 재계는 한국의 비료공장 건설에 협력해야할 의무가 있다. 한국은 수십년간 일본 통치하에서 착취를 당했는데 일본은 차제에 그 부채를 갚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 농민에게 절실한 비료공장을 일본의 협력으로 건설하게 되면 한일간의 선린우호에도 이바지할 수 있게된다』고 역설했다.
그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정식국교도 없었으며 일본의 외환사정도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일본의 비료공장은 그 규모가 10만t 내외에 불과해 몇배나 더 큰 규모의 한비건설계획에 대해 일본 업계는 경계와 질시의 눈초리로 격렬한 반대를 했었다. 그러나「이나야마」회장은 단호하게 소리보다는 대국을 보며 한국을 도와주려고 했다.
결국 나는「이나야마」회장의 안내를 받아「도시마」사장,「후지노」회장과 함께 수출입은행「스미다」(징전)행장을 찾아가 민간차관을 교섭하게 되었다. 이때도「이나야마」회장은 예의 주장을 펴며 수출입은행의 협력을 부탁했다. 당시로서는 거액인 4천수백만달러나 되는 차관에다 금리도 실세보다 2%나 낮은 저리로, 또 상환기간까지도 두배나 연장해 주는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이나야마」회장의 숨은 노고의 결과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민간차관으로는 첫 케이스이기도 했다. 그때 일본 재계 거물들의 그와같은 협조가 없었던들 일본의 유력기계메이커가 1백60개사나 참여하고 4백여개의 하청업체가 동원되는 세계최대의 비료공장인 한비의 건설은 난망했을 것이다.
「이나야마」회장의 한국에 대한 호의와 이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최신의 설비와 최고의 첨단기술을 갖춘 세계최대의 신일본제철사장과 회장을 역임하며 세계적「철인」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우리나라 포항제철이 바로 신일본제철의 경영 노하우와 전철을 밟아 지금 세계굴지의 제철공장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평소「이나야마」회장과 친교를 나누면서 여러모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오늘의 일본이 세계적 부국이 된것에 자만하기 보다는 국민의 절제와 기업간의 화합, 협력으로 장래에 대비해야 한다는「인내의 철학」을 부단히 역설했다.「이나야마」회장은 한 나라의 복지, 사회보장이 국민평균소득의 45%가 넘으면 그나라 국민은 나태와 무기력에 빠지는 선진국병에 걸려 국가적 활력을 잃게 된다는 경고도 했었다.
일본의 기업들이 부머랭 효과를 핑계로 한국과의 기술협력을 기피하려고 할때도「이나야마」회장은 일본이 한국경제발전에 협력하는 것은 아시아 공동번영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85년 여름 일본에서「이나야마」회장과 함께 골프를 칠때인데『이회장, 앞으로 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크게 걱정입니다』라고 말하며 미일 무역마찰사태가 심각한 국면에 있는 것을염려하고 있었다.
그는『세계의 평화와 자유주의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미국이 강해져야 한다』는 말과 함께『그 미국이 곤란한 형편에 있을수록 일본이 협조해야 한다』고 했던 얘기도 기억에 새롭다.
그는 미국을 다녀온지 며칠만이라면서 그때의 미일관계를『태평양전쟁전야』에 비교하고 있었다. 일본은 무차별 대미수출로 일방적인 이익만 추구하고 미국은 손해만 보는 입장이었으니 그말의 뜻을 십분이해할수 있었다.
「나카소네」수상을 만나서도 똑같은 말을 했더니『재계가 나서서 좀 도와 주십시오』라는말을 하더라고 했다.
일본은 그의 타계와 함께「일본경제를 번영으로 이끈 대공로자」를 잃었다고 애도하지만 나는 고우와 한일경제협력의 은인을 함께 잃은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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