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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평전(正男評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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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베이징 총국장

그는 양녕대군을 꿈꿨다. 밖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은 권력투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부친을 닮은 면도 있고 안 닮은 면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결정적으로 닮지 않은 점은 바로 권력의지의 유무였다. 그는 “정치와 무관한 사람”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후계자가 될 운명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후계자를 꿈꾸면 꿈꿀수록 자신의 신변이 위험해질 뿐이란 사실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는 출생의 비밀과 유년 시절의 원체험, 오랜 해외생활과 자유분방한 천성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그는 백두혈통의 일원이지만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건 아니었다. 그의 나라에서 신이나 다름없던 할아버지에겐 출생 사실이 비밀로 부쳐졌던 것이다. 아버지 김정일이 유부녀, 그것도 할아버지 김일성이 극진히 대접한 작가 이기영의 며느리(성혜림)와의 사이에서 얻은 혼외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건 다섯 살이 지나서였다. 어머니는 이런 일들로 인해 우울증을 앓고 모스크바로 요양을 갔다. 그는 대신 이모의 손에서 외부와 격리된 채 자랐다. 유일한 벗이던 이종사촌 이한영은 1982년 한국으로 망명했다가 97년 괴한의 총격으로 숨졌다. 그를 키워준 이모와 이모부는 미국에 망명해 있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모두 적대국가로 망명했고 그의 친모도 한때 망명을 시도했으니 공화국의 지도자가 되기엔 치명적인 결격사유였다.

9년 남짓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갈 무렵, 그는 외부 세계와 대비되는 조국의 현실을 궤뚫고 있었다. 답답한 평양 생활은 오랫동안 ‘외국물’을 먹고 자란 그에게 맞지 않았고 부친도 그런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는 훗날 “완전 자본주의 청년으로 성장해 북한에 돌아간 때부터 부친은 나를 경계했다”고 술회했다.

본격적인 양녕대군 생활은 95년 베이징으로 나와 살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여러 차례 일본을 드나들었다. 도쿄의 유흥가 아카사카(赤坂)에 단골 술집이 있을 정도였다. 한국인 손님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한국인 종업원과 밤새워 어울렸다. 현찰로 꽉채운 가방을 들고 다니며 종업원에게 보석 선물을 하기도 했다. 정녕 그가 후계자였다면, 혹 후계자가 되고픈 일말의 뜻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남의 눈에 띄는 일을 했을 리 없다. 2001년 ‘디즈니랜드 사건’ 이전부터 그는 후계자 경쟁과는 상관없는 양녕의 길을 가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복동생은 그를 위험한 존재로 여겼는지 모른다. “중국식 개혁·개방만이 살 길”이라고 공공연히 말한 그를 옹립하려는 외국 정부의 비밀 계획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을 수도 있다. 역사 속 양녕도 한때 동생 세종으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종국에는 화해하고 천수를 누렸다. 그것이 그와 양녕의 큰 차이점이었다. 46년의 짧은 삶, 제 의지로 제 삶을 개척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다는 점에선 이 땅의 수많은 분단 희생자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