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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 견제해 전횡 막자 vs 경영권 방어책도 마련돼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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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호 05면

1與3野 체제, 상법 개정안의 운명은

지난 14일 정갑윤 의원(무소속ㆍ왼쪽 넷째)이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야당이 발의한 상법개정안과 관련해 반대 입장을 밝혔다. [뉴시스]

지난 14일 정갑윤 의원(무소속ㆍ왼쪽 넷째)이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야당이 발의한 상법개정안과 관련해 반대 입장을 밝혔다. [뉴시스]

대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이 정치권의 핫 이슈로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국면 속 재벌 개혁이라는 화두와 맞물리고 국회가 1여(與)·3야(野) 체제로 재편되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집중투표제·감사위원 분리선출 #여야 견해차 커 통과 산 넘어 산 #다중대표소송제·전자투표제도 #의견 접근 쉽지만 각론엔 이견 #"실리콘밸리처럼 차등의결권 도입" #"이사회 독립성 확보가 선결 조건"

여야 간 협상 테이블은 크게 2+2로 나뉜다. 여야가 대척점에 있는 두 가지 사안과 의견 접근이 비교적 쉬운 두 가지 사안이 있다. 하지만 실제 국회 통과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지난 23일 국회 본회의가 열렸지만 상법 개정안은 전 단계인 법제사법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계류된 상태다. 27일 다시 논의한다는 방침이지만 김진태(자유한국당) 의원 등의 반대가 만만찮다.

현대차 의결권, 28.3%→8.3% 줄어들 수도

여야 간 견해차가 큰 두 가지 쟁점은 감사위원 분리선출제와 집중투표제 의무화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는 감사위원을 맡을 이사는 처음부터 다른 이사들과 분리해 선출하고, 이때 대주주의 의결권을 지분과 관계없이 3%로 제한하도록 한 제도다. 소액주주가 선발하는 감사위원을 늘려 이사회 감시와 견제 기능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도입 취지다. 하지만 재계는 투기자본에 의해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다며 3% 룰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대주주에게만 의결권 제한조치를 둔 점을 악용해 2대 주주가 더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경영권 방어에 구멍이 뚫릴 수 있어서다. 특히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가 ‘지분 쪼개기(3% 이하)’를 이용, 의결권 제한규정을 피해 대기업 감사위원 자리를 장악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는 현대모비스(지분 20.8%)와 정몽구 회장(5.2%), 정의선 부회장(2.3%)이 주요 주주다. 이들은 이사 선임 과정에서 28.3%의 의결권을 행사해 왔다. 그렇지만 감사위원 분리선출제가 적용되면 이들의 의결권은 총 8.3%로 떨어진다. 현대모비스와 정 회장의 의결권이 각각 3%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한미약품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가 보유한 41.37%의 지분으로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단 3%에 불과하다. 재계 관계자는 “외국 헤지펀드 서너 곳이 손을 잡으면 대기업 이사회 9~10명 가운데 감사위원 4명의 자리를 모두 꿰찰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이사진을 선임할 때 주당 한 표씩 의결권을 부여하지 않고 선임되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가령 이사 3명을 뽑는다면 한 주를 가진 주주는 3표를 한 사람한테 몰아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소수 주주도 연합해 이사 선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배주주를 견제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재계는 집중투표제가 이사회 구성원을 이질화해 경영 효율성이 저해된다고 반발한다.
반면 전자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는 상대적으로 통과 가능성이 큰 사안이다. 여야 4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지난 9일 전자투표제 의무화와 다중대표소송제 등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 처리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발표해 사실상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의견차가 크다.

다중대표소송제란 모회사 주식을 1% 이상 소유한 주주가 자회사 경영진의 불법 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제도의 취지에는 여야 모두 공감하지만 적용 대상인 모회사의 자회사 지분 비율에 대해 야당은 30~50%, 여당은 100%를 제시한 상태라 좀 더 협의가 필요하다. 2013년 7월 당시 입법 예고된 법무부안은 50%였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20일 법사위 소위 회의에서 “다중대표소송제는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라며 “그때도 재계가 반대해 여기까지 왔는데 언제까지 쳇바퀴 돌 듯할 거냐”고 비판했다.

노무현 참여정부 때부터 수차례 개정 시도

전자투표제는 주주들이 인터넷 등 온라인을 통해 주주총회 안건에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자유한국당은 해킹의 위험성을 완화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 전자투표제 도입 취지와 맞닿아 있는 만큼 아예 의결정족수를 완화시키는 내용을 함께 넣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야당은 전자투표제와 의결정족수 완화는 별건으로 다뤄야 한다며 소극적이다.

상법 개정안에 대해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지난 20일 대한상공회의소 최고경영자(CEO) 조찬 강연에서 “경영 안정성을 위협하는 등 다른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며 “법안을 도입한다면 현재 우리나라에 거의 없다시피 한 경영권 방어 제도를 같이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이 재계의 반대를 이유로 반대 입장을 고수하는 이상 2월 국회 처리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

상법 개정안 도입을 둘러싼 논란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5년부터 당시 여당(열린우리당)은 다중대표소송제 등을 도입하려 했다. ‘경제민주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박근혜 정부도 2013년 상법 개정안 통과를 시도한 적이 있다. 김관영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는 24일 기자간담회에서 “상법 개정안에 대해 자유한국당의 변화된 입장을 촉구한다”며 “경제민주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회사 분할 시 자사주에 대한 신주 배정 금지조항 이 세 가지는 2013년 7월 법무부에서 정부안으로 입법 예고까지 한 내용이지만 그동안 대기업의 로비와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국회가 완전한 여소야대로 흘러감에 따라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이 ‘전가의 보도’를 다시 휘두르는 것”이라며 “전자투표제 같은 장치만 하더라도 일일이 법으로 강제해야 할 사항인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전자투표제를 법제화한 국가는 대만·터키다. 다중대표소송제를 명문화한 국가는 일본뿐이다. 일본마저도 모회사가 지분 100%를 가진 자회사에만 다중대표소송을 허용한다.
재계의 우려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초국가적 규모로 움직이는 데 반해 한국은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장치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미국을 비롯해 영국·캐나다·싱가포르 등 영미권 법체계 국가들은 기업공개(IPO) 상장 시 차등의결권 제도를 허용하고 있다. 보통주는 주당 의결권 한 개를 갖지만 차등의결권을 갖고 있는 주식 소유자는 주당 10개 또는 100개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은 대륙법체계인 일본도 2008년 상법을 개정해 주당 한 개의 의결권이 부여된 보통주와 달리 여러 주식을 묶어야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단원주(單元株)’를 도입했다.

알리바바, 차등의결권 있는 뉴욕 직상장

중국 알리바바가 2013년 홍콩증시 상장을 계획했다가 뉴욕거래소로 직행한 것도 홍콩거래소가 차등의결권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기업공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할 때 주식이 A형과 B형으로 나뉜다. A형은 주당 1의결권을 갖는 보통주식이다. 반면 창업자가 갖는 B형은 A형에 비해 수십~수백 배 많은 의결권을 보유한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은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밋 등 공동 창업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클래스B 주식이 일반주주들이 보유하고 있는 클래스A 주식에 비해 주당 10배의 의결권을 가진다. 이를 통해 63.7%의 안정적인 의결권을 확보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회사 지분 15%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가 가진 의결권은 과반이 넘는다.

단 한 주만 갖고 있어도 적대적 인수합병(M&A) 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황금주’도 있다. 보통 공기업이 민영화된 뒤에도 공익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유하는 특별주식으로, 1984년 영국 브리티시텔레콤(BT)의 민영화 과정에서 처음 도입됐다.

이 때문에 한국도 신생 벤처기업, 중소기업부터 차등의결권 시스템을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외국에 비해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수단은 매우 열악하다”며 “포이즌 필은 회사에 손실을 줄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지만 차등의결권과 황금주 제도는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포이즌 필(Poison pill)이란 적대적 M&A나 경영권 침해 시도가 발생할 경우 기존 주주에게 시장 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하지만 경영권 방어 제도가 ‘대기업 총수 1인체제’만 견고하게 할 뿐이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포이즌 필과 차등의결권은 이사회의 독립성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제도”라며 “한국 기업의 이사회는 아직 미국 수준의 신뢰를 확보한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 기업만큼 이사회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일이 선결과제라는 뜻이다. 조명현(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장)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도입에 앞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지, 21세기 한국 기업에 꼭 필요한지 진지한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SK-소버린 사태

2005년 SK 주총에 참석한 외국인투자자. [중앙포토]

2005년 SK 주총에 참석한 외국인투자자. [중앙포토]

·2005년 소버린펀드가 SK㈜ 주식 14.99%(1768억원어치) 매입, 2대 주주로 등장
·집중투표제·전자투표제 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
·SK㈜ 경영권 방어 위해 주식 매입→주가 급등, 소버린 매도→차익 9539억원 얻어

김경희·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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