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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이어 VX까지 … 북한, 새로운 국제제재 받을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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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4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내외신 기자들이 취재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김유성 영사부장(오른쪽)이 정문 안쪽에서 “전날 말레이시아 경찰이 (김정남 암살사건 관련) 수사 협조 공문을 대사관에 보냈다고 했지만 받은 바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읽고 있다. [쿠알라룸푸르 AP=뉴시스]

24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내외신 기자들이 취재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김유성 영사부장(오른쪽)이 정문 안쪽에서 “전날 말레이시아 경찰이 (김정남 암살사건 관련) 수사 협조 공문을 대사관에 보냈다고 했지만 받은 바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읽고 있다. [쿠알라룸푸르 AP=뉴시스]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 시신에서 나온 신경작용제 VX는 대량 살상 화학무기다. 그동안 북한이 최소 수천t의 생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이를 시리아 등 일부 국가와 거래했다는 의혹은 여러 차례 제기된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 경우는 없었다. 결국 핵·미사일 개발에 따른 대북제재와는 별도로 북한이 국제사회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대북제재에 직면할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북, 치명적 신경작용제로 김정남 암살 #VX, 사린 가스보다 독성 100배 강해 #북 화학무기 최대 5000t 보유 추정 #이라크·시리아 수준 추가 제재 거론

VX는 1952년 영국에서 살충제 목적으로 개발한 독성이 매우 강한 화학물질이다. 액체와 기체 상태로 모두 존재하며 몸에 흡수될 경우 자율신경을 손상시켜 몇 분 안에 사망에 이른다. 94년 일본 옴진리교 광신도는 이번 김정남 암살의 경우처럼 오사카(大阪)에서 한 남성을 VX로 공격해 살해했다.

정희선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장은 “신경작용제는 크게 사린과 VX가 있는데 VX는 사린보다 100배 더 강한 독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쇼와(昭和)대 약학부 사토시 누마자와(독극물학) 교수는 이날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VX는 몸에 흡수되면 자율신경을 손상시킨다. 거품을 내뿜거나 근육 경련을 일으키면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했다.

유엔은 91년 결의 687호를 통해 치명적 독성을 지닌 VX를 대량살상무기(WMD)로 규정했다. 이어 93년 유엔 화학무기금지협약(CWC)이 VX를 화학무기로만 사용되는 ‘1급 물질(Schedule 1 substance)’로 규정, 2007년까지 모두 폐기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북한은 사린과 VX 등 화학무기를 생산해 와 최대 5000t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정부 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지난 13일 암살당한 김정남의 눈과 얼굴에서 맹독성 신경작용제인 VX(동그라미로 표시된 부분)가 검출 됐다고 24일 말레이시아 경찰이 발표한 보도자료.

지난 13일 암살당한 김정남의 눈과 얼굴에서 맹독성 신경작용제인 VX(동그라미로 표시된 부분)가 검출 됐다고 24일 말레이시아 경찰이 발표한 보도자료.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은 함경북도 청진, 평안북도 신의주 등 8곳에 화학무기 생산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국방부 당국자는 “그동안 핵·미사일 도발에 가려져 있었을 뿐 60년대 시작된 북한의 화학전 능력은 상당한 수준”이라며 “유사시 미사일이나 장사정포 등을 통해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위협”이라고 강조했다.

VX의 치명적인 위협은 전 세계 분쟁 현장에서 여러 번 드러났다. 88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은 할라브자 지역에 거주한 쿠르드족을 상대로 VX·사린 등을 이용한 대규모 학살극을 벌였다. 유엔 등에 따르면 당시 7만 명의 쿠르드족 가운데 5000여 명이 죽고 7000여 명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2013년엔 시리아내전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반군을 대상으로 VX와 사린 등 화학무기를 탑재한 로켓 공격을 감행해 최소한 민간인 1400여 명이 사망했다. 그 직후 유엔 화학무기금지기구(OPCW) 조사단은 현지 조사를 통해 시리아가 약 1000t의 VX와 사린가스를 보유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북한은 2009년 화생방 방호복 2만여 벌 등 각종 화학무기 관련 물자를 화물선에 실어 시리아에 보내려다 적발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은 시리아에 화학무기 생산기술과 장비를 지원해 온 대표적인 나라로 국제사회가 지목하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북한은 실제 생화학무기를 사용한 이라크·시리아와 같은 수준의 추가 제재 논의 대상에 오를 수 있다.

정희선 전 소장은 “VX 등 신경작용제는 개인이 합성해 내기에는 힘들고 국가기관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이 북한 정권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외교부 당국자도 “말레이시아 공항이라는 다중이용시설에서 북한이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드러난 이번 사건은 대북 압박 범위가 핵과 미사일 개발뿐만이 아니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다각적인 대북 압박이 시작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차세현·이철재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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