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국적 이정철 체포, 독약 장갑 추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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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01면

[말레이시아 현지 르포] 탄력받는 김정남 암살 북한 배후설

말레이시아 경찰이 18일 공개한 암살 시도 직후 공항에서 발견된 김정남의 모습. 김정남의 가슴 부분에 피살에 쓰인 독극물로 보이는 액체가 묻어 있다. 오른쪽 사진은 이날 체포된 북한 국적 용의자 이정철. 사건 당일인 지난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CCTV에 찍힌 모습. [AP=뉴시스]

말레이시아 경찰이 18일 공개한 암살 시도 직후 공항에서 발견된 김정남의 모습. 김정남의 가슴 부분에 피살에 쓰인 독극물로 보이는 액체가 묻어 있다. 오른쪽 사진은 이날 체포된 북한 국적 용의자 이정철. 사건 당일인 지난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CCTV에 찍힌 모습. [AP=뉴시스]

북한 김정남 피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북한 국적의 이정철(47·여권명 Ri Jong Chol)이 17일 오후 9시50분(현지시간) 말레이시아 경찰에 체포됐다. 이정철은 지난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청사 사건 현장에서 자주색 폴로 셔츠 차림을 한 50대의 또 다른 용의자와 함께 노란색 모자를 쓰고 있던 인물이다.

노란색 모자 썼던 47세 이씨 #외국인 노동자 신분증 소유 #중산층 거주지서 가족과 살아 #현지 언론 “평소 북한말 써” #말레이 경찰, 도주 3인 공개수배 #김정남, 사망 당시 여권 4개 소지

북한 국적 용의자의 체포로 말레이시아 경찰 수사가 급물살을 타는 한편 김정남 암살의 북한 배후설도 탄력을 받게 됐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18일 오전 11시45분 전날 이정철 체포 상황을 담은 공식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1970년 평양 태생인 이정철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발급되는 말레이시아 신분증인 ‘i-Kad’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적시됐다. 이정철은 중산층 거주지인 쿠차이 라마의 다이너스티 가든 콘도미니엄에 50대 부인과 10대 딸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웃들은 지난주부터 부인과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말레이시아 중문지 동방(東方)일보는 “이정철이 평소 중국어가 아닌 북한말을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이정철이 북한 국적의 말레이시아 파견 노동자일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다만 그가 파견 노동자 신분인 데도 가족과 함께 외국 생활을 해왔다는 게 일상적인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정철이 고정간첩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날 오후 북한대사관의 벤츠 차량이 이정철이 수감된 세팡 경찰서에 나타났지만 영사 접견이 성사됐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날 오후 현지 중국보는 이정철과 다른 한자의 이종철(李鐘哲)로 표기한 인물이 “특수 신분”이며 “그가 일찍이 국내 모 대사관과 접촉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이어 “도주한 나머지 용의자 3명은 13일 사건 종료 뒤 말레이시아를 탈출했으며 목적지는 불명확하다”고 덧붙였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도주한 용의자 3명에 대해 공개 수배하고 이들의 행방을 쫓고 있다.

말레이 경찰은 또 사건의 결정적 증거가 될 ‘독약 장갑’을 추적 중이라고 현지 중문매체 성주(星洲)일보가 18일 보도했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경찰은 체포한 여성 용의자 2명의 협조로 조사를 벌였으나 현재까지 김정남을 숨지게 한 독약 의심 물질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첫 번째로 붙잡힌 용의자인 베트남 국적의 도안티흐엉(29)은 이번 사건을 주도한 남성이 이 독약 의심 물질을 장갑을 낀 흐엉의 손에 따라줬고 도안은 김정남을 습격한 뒤 장갑을 벗고 손을 씻었다고 진술했다.

한편 김정남은 사망 당시 여권 4개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하나는 붉은색, 3개는 남색이었다고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이 밝혔다.

자국민 체포로 궁지에 몰린 북한은 역공세에 나섰다. 이정철 체포 두 시간 뒤인 17일 오후 11시45분 강철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는 쿠알라룸푸르병원(KLH) 부검실 앞에 있던 취재진에게 모습을 드러낸 뒤 A4 세 장 분량의 영문 자료를 배포했다. 강 대사는 “부검을 마친 시신의 반환을 거부하는 말레이시아 정부에 강력 항의한다. 국제 법정에 소송하겠다”고 7분가량 위협 발언을 쏟아낸 뒤 사라졌다. 강 대사는 “한국 정부가 직면한 사상 최대의 정치적 스캔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 국가(북한)의 이미지를 파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오전 말레이시아 외교부 차관을 만났고, 오후에는 경찰본부를 찾아 항의했다며 말레이시아가 외교 여권을 소지한 북한인 보호 의무를 위반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탄 스리 칼리드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18일 “김정남 가족의 DNA가 확보되지 않는 한 수사가 종결될 수 없다”며 북한의 항의를 일축했다. 칼리드 청장은 “말레이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법과 규정을 따라야 하며 여기엔 북한도 포함된다”면서 “경찰 조치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변호사에게 자문하라”고 말했다. 다투크 세리 수브라마니암 보건장관도 이날 오후 기자를 만나 말레이시아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말레이시아 당국의 부검이 진행 중이므로 북한이 말레이시아 법규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수브라마니암 장관은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을 우리 법에 따라 처리 중이며 북한법에 따라 처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결과 확정에 중요한 독성 검사 보고서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번 주 내 발표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말레이시아 경찰의 북한 국적 용의자 이정철 체포 보도자료. [말레이시아 경찰]

말레이시아 경찰의 북한 국적 용의자 이정철 체포 보도자료. [말레이시아 경찰]

한편 김정남이 피습 직후 공항 진료소에서 혼절한 사진이 현지 언론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영자지 뉴스트레이츠타임스와 말레이어 신문 메트로는 진료소 폐쇄회로TV(CCTV) 화면에 잡힌 김정남의 사진을 1면에 실었다. 감색 폴로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김정남은 묵주를 한 오른손을 높이 뻗은 채 두 눈을 감은 모습이었다.

이정철은 김일성대 졸업생=이정철의 것으로 추정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따르면 이정철은 2000년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와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IACS(Innovation Academy Charter School)를 졸업한 것으로 적혀 있다. 페이스북에는 이정철이 화학 실험을 하고 있는 사진도 올라와 있다. 이정철은 한동안 인도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페이스북에는 “지금 인도 콜카타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며 “박사후 과정을 밟고 있다”고 적혀 있다.

쿠알라룸푸르=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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