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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대훈의 시시각각

소록도, 끝나지 않는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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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고대훈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국장
고대훈 논설위원

고대훈
논설위원

요즘 ‘박근혜’ ‘최순실’ ‘김정남’ ‘트럼프’라는 네 사람의 이름은 모든 뉴스를 끌어들이는 블랙홀이다. 네 단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뉴스 가치가 결정된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들로 뒤덮여 있던 지난 15일 ‘단종(斷種)’ ‘소록도’ ‘한센인’이라는 흥미로운 단어가 내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동안 잊혀졌던 아련한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등장한 배경이 궁금했다.

한센인 단종의 슬픈 역사 
사죄 없는 배상으로 끝나나

대법원은 이날 한센인 남성 9명에게 3000만원, 여성 10명에게 4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이들에게 단종(정관 절제)과 낙태(임신 중절)를 강요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물은 것이다. 단종은 말 그대로 ‘씨를 끊어 버리는 것’이다. 일제 시대 때부터 해방 이후 수십 년간 자행된 야만의 역사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대법원의 판결문을 찾아봤다. 한센인이 단종과 낙태를 강요당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조선총독부는 소록도병원에서 한센인 부부의 동거를 허용하면서 단종수술을 강행했다. 이를 거부할 경우 폭행·협박·감금을 자행했다. 소록도뿐 아니라 부산·익산·칠곡·안동 등지에서도 한센인들은 임신·출산의 천부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삶을 보냈다. 이러한 정책은 해방 후에도 지속돼 1990년대까지 강제로 단종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단종과 낙태는 ‘한센병=유전병’이라는 대중의 무지와, 치유 가능한 전염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방조한 국가 폭력이 합작한 비극이었다.

미당 서정주가 1941년에 발표한 『문둥이』는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밤이 되면 아기의 간을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며 한센인의 비애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심었던 작품이다. 소송에 참여한 한 피해자의 증언 중 한 토막. ‘A씨(72·여), 20살 때 발병해 제주도에서 구걸하며 지내다 28살에 소록도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단종수술을 받았고, 네 달간 이유도 없이 감금되고 직원들에게 곡괭이 자루로 폭행당함.’

더 당혹스러운 사실은 국가가 수십 년 동안 책임을 회피한 것도 모자라 보상이나 지원은커녕 소송에 지면서도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며 5년을 끌었다는 점이다. 단종·낙태 피해자는 2007년 한센인 피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정받았다. 그러나 정부는 “명시적인 의사에 반하여 강제적으로 단종과 낙태를 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며 배상을 거부했다. 박영립 변호사(한센인권변호단장)는 2011년 10월부터 한센인 정착촌에서 벌어진 강제 단종과 낙태 수술의 피해자들을 대리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박 변호사는 “소송이 제기된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국가가 먼저 사죄하고 피해를 보상했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아직도 같은 피해를 당한 500여 명의 한센인은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대법원은 배상의 정당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국가는 사회적인 차별과 편견에 편승해 한센인들을 격리하고 자녀마저 두지 못하게 함으로써 심한 열등감과 절망감을 심어 줬다”고 규정했다. 또 “인간 본연의 욕구와 행복추구권을 제한해 한센인들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고 수치심을 느끼도록 한 반인권적·반인륜적 성격이 강하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2006년부터 일제 강점기에 강제 격리된 한국과 대만의 한센인들에게도 800만 엔씩 일괄적으로 보상했다. “일본은 다른 나라 사람도 보상한다. 천문학적 돈을 각종 ‘무상’ 정책과 지원사업에 쏟아부으면서도 인권유린을 당한 한센인에겐 이렇게 인색한 게 한국의 현실”이라는 박 변호사의 말은 울림이 있다.

한센인의 단종 사건을 들춰낸 이유는 이 속에 담긴 상징성 때문이다. 저항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가한 국가와 사회의 폭력이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을 약자에 대한 멸시와 학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소록도의 비극이 재연되지 않도록 막으려면 말이다.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