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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격차 좁아진다|3세대가 진단하는 변모 22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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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리는 역사발전의 정당한 단계로서, 또 우리의 값진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서 민주화를 꼭 이루어내야 할 시점에 와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왜곡된 정치·사회·문화체계로 인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훈련이 부족한 상태에서 민주화의 길에는 적지 않은 혼선과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때 민주화를 위한 의식을 정립하고 그것을 바탕 해 줄 가치관의 확립이 절실해졌다. 중앙일보는 창간 22주년 기념특집의 하나로 「민주화시대의 가치관」을 말하는 좌담을 마련했다. 이 좌담에는 60대·40대·20대의 각각 다른 세대, 다른 직종의 남녀 6명이 참여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각각 다른 시각에서 민주화시대의 가치관을 모색했다. <편집자주>
▲김치수=민주화가 논의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 한꺼번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노출은 어떻게 보면 불안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민주적인 논의, 자유로운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한번 겪어야 할 과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따라서 민주화 사회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논의는 이 같은 갈등을 어떻게 점진적으로 해소해 가느냐는 논의와 관련되리라 봅니다.
이 자리에는 각기 다른 세대, 각기 다른 일을 하는 분들이 모였으니 이야기도 폭넓게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군요. 제 생각으로는 우리사회의 갈등들의 요인을 살려보면 빈부의 차이, 지배·피지배관계, 기회불균등, 여성문제 등이 있을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요인은 가치관의 갈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김태길=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사회구조가 더욱 복잡해지면서 갈등은 더 심화되는 것 같아요. 과거 농경시대를 생각해보면 공동체적 생활속성으로 인해 인간관계가 정으로 연결돼 있었고, 때문에 갈등의 극복이 용이했지요. 또 접촉범위가 제한적이어서 갈등의 요인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문·집단적 가치관이 붕괴된 현대사회에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갈등의 범위가 확대된 것입니다. 특히 금력·권력·지위 등 경쟁성이 강한, 남을 눌러야 얻을 수 있는 가치관이 팽배해지면서 대립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죠.
▲임문영=우리사회가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붕괴되고, 노동자계층이 형성되면서 계층간의 갈등이 첨예화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합니다.
▲김치수=민주화사회가 이룩되어 이 같은 갈등들이 해소된다면 그 모습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임문영=젊은 대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해 볼까요? 민주사회란 자기가 일한 만큼 정당한 보상을 받고, 또 자기가 하고자하는 것을 실현할 기회가 있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회는 제도적 보장으로 가능해질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나라와 같이 특수한 현실에서는 이보다도 더 큰 대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민족이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 생존을 이루어야한다는 점과 극심한 이데올로기로 대립돼있는 분단현실이 통일로써 극복되어야한다는 점입니다. 외세간섭 및 분단현실이 지속되는 상황에서의 민주화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김태길=통일을 바라보면서 부단한 민주화의 노력을 기울여야지요. 통일이 민주화의 우선 조건은 아닐 것입니다. 민주화를 통일의 발판으로 삼는 것, 그게 60대의 사고방식입니다.
▲오춘양=기회균등과 공정분배 등 평등이 민주화의 주요 요건이라면 남녀평등도 빼놓을 수 없지요. 인구의 절반이 넘는 여성들도 당연히 자유로운 자기실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가족법 등 제도화된 제약을 비롯 일상적 관습 등 비 제도화된 불평등이 무수히 많은 것 같아요.
▲김치수=결국 여성문제의 해결도 민주화요건의 핵심을 이루고 있군요. 실제로 일하는 여성은 많으나 일하고자 해도 일자리가 없는 여성들이 더 많다는 얘기가 그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처럼 일자리가 없어 일을 못하는 여성들을 실업자수에서 제외하고 있는 게 현실이에요. 이는 곧 여성차별의 상징적 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유로운 자기실현의 문제부터 남녀평등 문제까지 민주화과제에 대한 생각은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민주화 과정 속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논의해보면서 어떤 가치관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지요. 우선 노사문제가 심각하지요?
▲김명희=앞서 논의됐듯이 일한 만큼의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민주화의 한 요건이라고 볼 때 최근 노사분규도 같은 맥락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구로공단 여공들의 일당이 2천7백원이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하루에 그 1천 배인 2백70만원을 벌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이 같은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쌓여 오늘날과 같은 폭력사태까지 온 것이 아닐까요? 사용자측에서 근로자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재평가를 해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치수=해방 이후 우리경제의 기형적 성장구조는 특혜에 의한 대기업중심 경제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모두 아시다시피 우리경제가 자본축적을 위해 대기업을 육성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근로자들이 지나치게 소외되었습니다. 대기업들은 자신들이 경제성장의 주체가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고있지만 이제는 근로자들의 땀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 것입니다.
그러나 과격한 노동운동은 어쨌든 지금까지 쌓아온 경제구조를 위태롭게 할 뿐 아니라, 나아가 권리주장을 내세울 대상마저 잃게될 위험성도 있습니다. 결국 노사 양측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근로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가족처럼 여기는 사용자들의 윤리의식이 그 처방으로 대두되는 것 같습니다.
▲임문영=과연 그러한 처방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실질적이고 본질적인 방안은 노동자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도록 보수를 많이, 아니 정상적으로 올려주는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기업들은 해방 이후 격변기를 통해 변칙적으로 성장했고 특혜구조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공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져 있거든요. 이 같은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일본처럼 노동자들을 가족처럼 대하자는 주장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서구나 일본의 기업윤리가 우리 경제에 수용되기 위해서는 분배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윤리가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오춘양=요즘처럼 노사문제가 큰 문제로 표면화되기 전까지는 그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몰랐습니다. 해결 당사자인 기업가들이 말이 아닌 실제행동으로 근로자들의 주장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여야 근로자들이 안심하고 일터에 나가겠지요. 그러나 파괴 등 극단적인 쟁의방법은 국민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우리를 경악케 하는 행동을 삼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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