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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오늘 레드카펫 주인공"…딱딱한 졸업식은 이제 '졸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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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부산 부일외고에서 졸업식이 열리는 강당에 붉은 카펫이 깔렸다. 검정색 졸업가운 차림의 졸업생들이 들어오자 10여 대의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졸업생의 입장을 기다리던 1, 2학년들이 카펫 옆에 도열한 채 함성과 박수로 이들을 맞았다. 일부 졸업생은 카펫을 따라 걸으며 주변에 손을 흔들었다.

교장이 한명씩 단상 세워 덕담
짝궁 그려 합성한 '단체사진'
매점·문구점 아저씨 축하 동영상도
졸업생 "두고두고 추억될 거에요"

부일외고는 2011년 이후로 영화제처럼 졸업식을 치르고 있다. 이 학교 박민영 부장교사는 “졸업생 하나하나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힘겨운 고교 시절을 잘 이겨내고 졸업식을 맞이하지 않았느냐”고 취지를 소개했다.

이날 졸업생 200여 명 전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강단에 올랐다. 학생마다 일일이 교장에게 덕담을 듣고 졸업장을 받은 뒤 악수했다. 성적우수상ㆍ공로상ㆍ봉사상 등 일부만 받는 상은 졸업식에 앞서 교실별로 시상식을 했다. 이런 상을 받지 못하는 대다수가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졸업생 김유영(19)양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학교에서 졸업생을 위해 감동적인 축제를 만들어줘 고맙다. 앞으로 살면서 두고두고 추억이 될 한 장면이 생긴 것 같아 선생님들께 정말 감사드린다”고 기뻐했다.

한때는 몇몇 학생만 강단에 오르고 교장 선생님 훈화가 주 행사이던 초ㆍ중ㆍ고교 졸업식이 달라졌다. 엄격하고 딱딱한 졸업식 대신 재미와 감동을 더한 축제 형태의 졸업식을 치르는 학교가 늘었다.

앞서 지난 8일 서울 관악구 미림여고의 졸업식. 무대 위 대형 스크린에 막 올라온 동영상에 얼굴 하나가 등장하자 환호가 터져 나왔다. 졸업생과 재학생 가릴 것 없이 “매점 아저씨다”며 환호했다.

“졸업생 여러분.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힘들거나 걱정되는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서 맛있는 것 먹고 가세요." 매점 아저씨의 축하인사에 박수와 함성은 더욱 커졌다. 이어 인근의 분식집 사장님, 문구점 아저씨의 덕담 영상이 잇따랐다. 졸업식을 준비한 학생회장 심민정(19)양은 “선생님이나 친구들 외에도 고교 시절 많은 추억을 안겨준 매점 아저씨, 분식집 사장님 등 다양한 어른들과 졸업의 기쁨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경기외고 졸업식에선 학생회장이 답사를 마친 뒤 부회장과 함께 최근 유행하는 가요 ‘걱정 말아요 그대’를 불렀다. 1학년 김주은(16)양은 “첫 소절이 나오자마자 졸업생과 재학생이 따라 부르고 부모님들까지 가세했다. 가사가 딱 와 닿아 마음이 뭉클했다”고 전했다.

10일 경기도 호곡중에선 졸업생이 학급별로 미술작품을 함께 완성했다. 반 전체가 모여 사진을 찍고, 이를 토대로 각자가 친구의 얼굴을 A4용지 크기로 그려 이를 한데 합쳤다. 그림은 졸업식에 맞춰 각 반 앞 복도에 전시됐다. 졸업생 신재혁(15)군은 “처음엔 귀찮을 것 같았다. 그림을 합치는 과정에서 서로 ‘잘 그렸다’ ‘재미있다’고 칭찬하며 웃었다”고 좋아했다.

일부 학교에선 권위주의를 내려놓은 축사가 화제가 됐다. 인천 하늘고 지용택 이사장은 축사에서 “이렇게 혼란한 사회를 물려준 기성세대로서 ‘어떻게 살아라’라고 조언할 자격이 있는지 부끄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포기하거나 불평하며 주저앉지 말라. 비판하고 저항하라”고 학생들을 격려했다. 자녀가 다섯이라는 학부모 임채은(48·인천 남동구)씨는 “졸업식에 여러 번 가봤지만 이번처럼 인상적인 졸업식 축사는 처음이다. 딸아이도 ‘축사를 평생 마음에 새기겠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중앙일보 TONG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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