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19. 깨진 해외 진출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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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필자가 히키-申이란 예명으로 녹음한 첫 앨범의 표지.

'님아'가 뜨기 전 나는 한국의 일반 무대에서는 성공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전쟁터인 베트남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그런 판단에서였다. 물론 베트남을 통해 프랑스 등 외국으로 진출해 보려는 욕심도 있었다.

그 이전 외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온 적은 있었다. 미 8군에서 한창 잘 나가던 1960년대 초반이었다. 미군 사이에서 인기가 있어 나는 미국 음악 매거진에 소개되기도 했다. 미국 본토 음반사에서도 스카우트하고 싶다며 초청 편지를 보냈었다. 그러나 그 편지가 내 손에 도착한 것은 발송된 지 1년이 더 지나서였다.

당시 소속 회사에서 내 스케줄이 가장 빡빡했다. 내가 빠지면 어려움을 겪을 게 뻔하자 회사 측에서 미국 진출을 방해한 것이다. 분통이 터졌다. 미국에 가면 소위 출세길이 열리는 건데 그 길이 막힌 것이다.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세상은 공평한 것일까. 대신 한국 시장에서 대박이 났다. '님아'는 그 시절 100만 장 이상 팔렸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기념삼아 펄 시스터즈에게 선물한 '님아'가 그런 대박을 터뜨릴 줄은 상상조차 못했었다. 막상 내가 승부를 걸었던 건 이전 작품인 '비속의 여인 '(애드 훠)과 '봄비'(이정화)였으니 말이다.

'님아'히트를 계기로 가요계는 획기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트로트가 주름잡던 분위기에서 현대 음악이 주류로 떠오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내 음악을 신기해했다. 가요계에 새로운 물결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대중은 새로운 음악 경향에 눈을 뜨게 됐다.

미 8군이고 뭐고 다 집어치웠다. '덩키스' 멤버를 보강해 '퀘스스'를 구성했다. 밴드로 연주 생활을 하는 한편 가수를 픽업하고 곡을 써댔다.

펄 시스터즈는 나와 소속사가 달라 미 8군 무대에서는 별도로 활동했다. 그러나 방송이나 콘서트 등에서는 퀘스스 밴드와 함께 출연했다. 나는 가수들을 훈련시킬 때 연습도 실전처럼 해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그래서 늘 밴드 반주를 동원했다. 피아노 한 대만 놓고 노래 연습을 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내가 키운 가수들은 그래서인지 모두 무대 매너가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미 8군 무대 경험이 많았던 펄은 자신감이 넘쳐났다. 펄 시스터즈는 트로트 가수와는 달리 화려한 율동이 많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펄은 TV 공개방송, 시민회관 콘서트 등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무 바빠 나조차도 얼굴을 대하기 힘든 대스타가 됐다.

펄이 히트하면서 가수들이 나에게 모여들었다. 김상희도 그 중 하나였다. 그녀의 음반 작업에 바빴던 나는 신인 지망생들은 신경 쓸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 와중에 나의 매니저가 신인을 하나 만나 달라고 부탁했다.

"제 친구의 처제인데 노래를 아주 잘합니다."

부탁이 집요하게 계속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럼 한번 오라고 하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여성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김추자였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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