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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신진보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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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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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충남지사는 눈빛이 강하고 언어가 정확하다. 생각이 골똘하며 판단이 분명하다. 말이 왔다갔다 하지 않는 장점도 있다. 입을 열기 전에 뜸 들이는 버릇이 있는데 개념을 잡기 위한 노력 같다. 다만 눈빛이 너무 쏘는 듯하면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한다.

동맹·대연정·역사긍정 친노 등장
지사직 던져 문재인과 정면 승부

그런 안희정에게 묻고 싶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학생운동권 시절 반미청년회를 이끌었는데 그때 품은 주사파 사상과 결별했나. 전향 선언은 했나. 둘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결국 문재인 전 대표의 들러리 신세 아닐까. 셋째, 그 막중한 대통령직에 도전하면서 왜 지사직을 버리지 않는가. 경선에 실패하면 한 번 더 해먹겠다는 양다리 걸치기인가. 안희정의 전향, 들러리, 양다리 문제는 요즘 그를 새로 보기 시작한 중도나 보수층 유권자들이 궁금해하는 사안이다.

실제로 경주 토박이인 50대 후반의 사업가 A씨. 그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배신당하고 반기문을 열렬히 밀었다. 반기문이 허무하게 무너지자 망연자실하다 안희정으로 확 돌았다. 모레부터 시작되는 민주당 국민경선 선거인단 등록에도 참여하겠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만은 막아야 한다는 게 A씨의 행동원리다. A씨의 의문도 세 가지였다.

나는 안희정의 30년 친구인 김종민 의원을 만나 ‘안희정의 생각’을 꼬치꼬치 물었다. 첫 번째 질문에 “주사파는 20대 대학 시절의 사상적 방황이었다.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 완전히 결별했다. 공직 선거 과정에서 이런 입장을 수도 없이 표명했다”고 답변했다. “안희정이라는 김치는 지금이 가장 잘 익은 상태다. 차차기는 의미가 없다. 문재인의 들러리냐 아니냐는 당원과 국민이 결정할 문제”라는 게 두 번째 응답. 세 번째 의문엔 “충남지사직에 연연하지 않는다. 직을 내놓지 않겠나. 충남 도민이 보궐선거를 치를 필요가 없는 시점이 언제인가”라고 흘렸다. 올해 일괄 보궐선거는 4월 12일에 있으니 선거법상 보선을 안 치러도 되는 3월 12일(선거 30일 전) 이후를 사퇴 시점으로 잡겠다는 말로 들렸다. 안희정은 한 달 뒤 자기 손으로 퇴로를 끊어야 문재인과 진검 승부의 의지가 증명될 것이다.

안희정은 상식적이고 언어에 일관성이 있다. 오리지널 친노지만 진영논리에서 시원하게 해방됐다는 느낌을 준다. 이 점이 부각되면서 안희정은 설 전 5%에서 보름 만에 20% 지지율을 넘보게 됐다. 반면 문재인은 30%를 맴돌고 있다. 중도·보수층이 문재인에게 흔쾌하게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왜 닫혀 있나. 근본적인 원인은 문재인의 정신이 미국을 제국주의로 보고(안보 불안), 보수를 청산해야 할 적으로 여기며(편가르기), 과거사를 치욕으로 규정하는(정의 독점) 80년대식 운동권 논리에 머물러 있다는 의심 때문이다. 진영논리를 되풀이하면 민주당 경선에선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플러스 알파가 더해져야 하는 정권교체에서 불리할 수 있다. 안희정은 경선에서 불리하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승리한다면 정권교체 가능성은 문재인보다 크다고 봐야 한다.

안희정의 상식적 사고, 단련된 언어는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았다. 2013년 그가 쓴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라는 책엔 안희정의 최근 주장을 뒷받침하는 생각의 뿌리들이 널려 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힘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미국이라는 자산을 훼손하면서 중국을 향해 서둘러 구애하는 것은 바람직한 외교 전환이 아니다.”(동맹 중시), “정말 극복하고 싶은 건 분열이다. 분노와 대결 속에 뒷걸음치다가 또 다른 독재형 지도자를 만나거나, 서서히 몰락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대연정의 싹), “학창 시절 나는 사대주의의 역사를 부끄러워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이 땅의 지도자들을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됐다. 비루한 역사가 아니라 한과 눈물로 지켜온 역사다.”(역사 긍정)

안희정은 노무현을 넘어선 친노다. 문재인이 구(舊)진보의 중심이라면 안희정은 신진보를 열고 있다. 민주당 경선전에서 구진보와 신진보가 치열하게 가치논쟁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