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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국회] '공공의 지식'이 되어버린 군사기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국방부의 전력증강계획이 인터넷에 유출돼 군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는 소식이다. 건수가 무려 250건이 넘는다고 하니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대부분 3급 비밀인 데다가 2급 비밀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파문은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이번에 유출된 기밀은 국방부와 공군이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약 12조 원을 투입, 한국형전투기(KFX)를 개발해 양산에 들어간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창군이래 가장 큰 전략무기 개발계획으로, 내년부터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5조 원 규모의 F-15K전투기 도입보다 2배 이상 큰 사업이라고 한다.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공군이 2007년부터 2010년까지 1881억원을 투입, KFX를 독자 개발하고 2020년경에는 자체 개발한 기체를 포함해 전투기 420여 대를 보유한다는 계획이다. KFX는 현재 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KF-16과 지난해부터 도입하기 시작한 F-15K의 중간 정도 성능으로 개발될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도 2018년까지 차세대구축함(KDX-III)인 이지스함을 모두 6척 보유하게 된다. 이지스함은 바다에 떠 있는 방공시스템이자 대함(對艦) 및 대잠(對潛) 능력을 갖춘 현존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전투함. 첨단 레이더의 최대 탐지거리는 400∼500km에 이르며 200개의 대공(對空) 목표를 동시에 탐지하고 추적할 수 있다.

이밖에 2012년까지 1만3000t급 규모의 대형수송함(LPX), 2010년부터 2022년까지 3500t급 규모의 차기 중잠수함(SSX) 3척 및 1800t급 규모의 214급 잠수함 9척을 도입하는 등 해군력 증강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유출된 내용에는 또 해군의 차기고속정(PKX), 차기호위함(FFX), 대형수송함(LPX) 등의 추가 건조와 육군의 무인정찰기(UAV)와 130mm 및 227mm 다연장로켓(MLRS) 양산, 공군의 경공격기(A-50) 양산 계획 등도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중요한 군사기밀이 어쩌다가 함부로 인터넷에 올려졌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 이유를 알아보면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홈페이지는 왜 필요한지를 전혀 모르는 '완전한 넷맹'들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무기구입을 전담하기 위해 최근에 신설된 방위사업청이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지난 2∼3일 사이 이곳에다 3급 기밀에 해당하는 '합동전략목표 기획서'의 요약본 20여쪽을 게재했다. 합동참모본부에서 건네 받은 200여 쪽 가운데 일부 내용이었다. 지난 4일에는 2010년부터 2022년까지 모두 3조744억원을 들여 3척의 잠수함을 도입한다는 차기 잠수함 사업문건이 공개됐다.

이런 내용은 육·해·공군 전반에 걸친 전력증강계획이어서 군사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훌륭한(?) 자료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네티즌들이 이를 퍼갔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된 방위사업청은 뒤늦게 삭제했지만 이미 '공공의 지식'이 됨으로써 '군사기밀'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정일 방위사업청장은 어제(9일)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비밀에 관련된 것이 홈페이지에 올라간 것은 잘못이며, 정보공개와 관련된 심의를 거쳤어야 하는데 실무자가 초기 단계에서 실수를 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이 정도면 말이 '실수'이지 '범죄'나 다름없다고 하겠다.

일부 군사평론가들 역시 '이번 일은 몇몇 실무자들의 실수로 보기 어렵다'면서 군 당국에서 의도적으로 사업계획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홍보했다가 문제가 되자 문건을 삭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한심한 일이다. 알릴 것을 알려야지 아무거나 알리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오늘날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네티즌들의 지적도 매우 예리하다. 네티즌들은 이번 '사건'의 원인을 해이된 군 기강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네티즌은 '요즘의 군대가 보이스카웃식으로 되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한탄했다. 어떤 네티즌은 '국민의 알권리를 주장하다가 급기야는 국방기밀까지 노출시키는 한심한 상황이 벌어졌다'며 '이번 기회에 보안의식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방위사업청장의 말대로 내용이 내용인 만큼 심의를 거쳐야 했는데 실무자들이 '홍보'에는 신경을 쓴 나머지 이런 일이 벌어졌다. 필자는 여기에서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대중가요 제목을 떠올리면서 '인터넷은 아무나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인터넷'이란 괴물(?)을 예사로 여기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접하면서 2000년 10월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 우리나라의 월드컵축구 조직위원회에서 만든 영문 홈페이지가 국가 공식사이트라고 보기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 올려져 있었다. 이를 알게 된 민주당 심재권 의원이 국정감사자료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

홈페이지에서는 월드컵을 공동개최하는 일본을 '혹독한 지배자'라고 표현하고 '한국에는 반일감정이 여전히 강하다'고 소개했다. 또 '한국에 가려면 장티프스, 소아마비, 디프테리아 접종을 고려해야 한다'고 권해 한국의 위생상태가 지극히 나쁜 것으로 비쳐지게 했다. 자료도 부정확해 체류기간이 30일인데도 15일로 되어 있었고, 시·도 단위로 통일된 지역 전화번호도 종전의 것을 그대로 두었다.

조직위원회에는 이 문제로 한바탕 난리가 겪어야 했다. 처음에는 누가 악의적으로 해킹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상조사 결과 홈페이지 제작업체에 모든 것을 맡겨 놓았고, 한 명 뿐인 담당직원은 다른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홈페이지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음이 밝혀졌다. 결국은 이 문제로 당시 조직위원회 사무총장과 홍보 담장자가 사표를 제출하고 물러나야 했다.

인터넷은 정말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고 있다. 인터넷으로 안 되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다. 이제는 '밥은 안 먹고 살 수 있어도 인터넷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지경으로 인터넷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이 엄청난 힘을 가진 만큼이나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컴맹·넷맹들은 더욱 그렇다. 그저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이로운 수단이라고 생각할 뿐 자칫 잘못 다루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입을 수 있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의 꽃'은 단연 홈페이지이다. 네티즌들은 인터넷바다를 헤엄치다가 근사하게 만들어진 홈페이지를 발견하면 그곳에 들어가 마음대로 구경하고,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퍼다가 나의 홈페이지에 옮겨놓는다. 물론 다른 네티즌도 나의 홈페이지에 들렀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자기 홈페이지로 퍼간다.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 보다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남에게 비밀로 해야 할 내용을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가 남이 보고 퍼가게 되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한번 퍼져간 내용이 삽시간에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됨으로써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방위사업청이나 월드컵조직위원회의 홈페이지와 관련하여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 역시 인터넷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홈페이지를 관리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하려면 인터넷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누구라도, 그리고 언제라도 화를 입을 수 있음을 이번 사건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국회 이재일]

(이 글은 인터넷 중앙일보에 게시된 회원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중앙일보의 논조와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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