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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접속하라, 낯설고도 지적인 신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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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원제 Arrival, 2월 2일 개봉, 드니 빌뇌브 감독)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는 영화다. 곳곳에 상징과 암시가 깔려 있고, 에이리언에 대한 접근 방식 또한 새롭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결정적인 열쇠는 감독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관심은 언제나 삶의 본질, 인간의 본성에 닿아 있었다. 에이리언영화의 외양을 한 ‘컨택트’ 역시 실은 사람에 관한 영화다. 장르영화의 묘를 가졌지만, 쾌감만 쫓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컨택트’는 근래 가장 새로운 SF인 동시에, 다분히 그다운 영화다. 그의 전작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컨택트’가 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컨택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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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구는 항상 당신을 향해 있다

격발 직전의 총구를 바라보는 듯한 긴장감. 빌뇌브 감독의 영화는 늘 그런 서스펜스로 넘실댄다. 그는 장르영화의 관습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컨택트’를 보자. 외계 생명체와의 만남을 그린 이 영화는 아예 서스펜스의 교본 같을 정도다. 영화는 낯선 방문자의 정체를 좀처럼 보여 주지 않는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반응부터 살피고, 녹음기를 통해 에이리언의 음성을 슬쩍 흘린 다음, 불안 속에 루이스(에이미 애덤스)를 현장으로 불러들인다. 루이스가 그들의 우주선인 셸을 맞닥뜨리는 장소는 낯선 광야다. 셸 내부는 지독히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의 공간. 외계인은 오직 이 공간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루이스와 외계인의 대화에 좀처럼 긴장을 풀 수 없는 이유다.

도플갱어를 다룬 ‘에너미’(2013)에서 주인공 아담(제이크 질렌할)은 우연히 자신과 닮은 배우를 발견하고, 그를 추적한다. 탐색·염탐·미행 등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한편의 수사물을 방불케 한다.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2015, 이하 ‘시카리오’)는 또 어떤가. 경찰 차량이 범죄 도시인 멕시코 시우다드 후아레즈를 거쳐 국경을 빠져나가는 대목의 카메라 워크와 긴박한 편집은 가히 압권이다. 중무장한 경찰대의 호위를 받으며 가는데도, 손에 땀이 난다.

껍데기가 아니라 안을 봐야 한다

‘컨택트’의 서스펜스는 분명 ‘헵타포드’라 불리는 외계인의 방문에서 비롯된다. 하나 영화를 흘러가게 하는 동력은 루이스가 헵타포드와 소통하는 과정이다. 이 영화가 ‘언어가 인지와 사고를 결정한다’는 언어결정론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게 된 루이스가 겪는 세계관의 혼란에 ‘컨택트’의 진심이 담겨 있다. ‘지구에 온 목적’을 알고자 했던 인류의 물음은, 후반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루이스에게 되돌아온다.

드니 빌뇌브 감독

드니 빌뇌브 감독

빌뇌브 감독의 영화는 늘 이렇게 내밀하게 움직인다. 서스펜스는 거들 뿐, 그가 건드리려는 주제는 주로 삶의 본질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다. 그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이 벌어진 배경과 영향에 대해 더욱 몰두한다. 유괴 사건을 다룬 ‘프리즈너스’(2013)도 그렇다. 범죄 스릴러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범인보다 아버지의 끓는 부성애를 그리는 데 열중한다. ‘시카리오’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의 얼굴이 아닌, 희생자 가족의 일상이다. 레바논 전쟁이 배경인 ‘그을린 사랑’(2010) 역시 실은 화해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다.

빌뇌브 감독은 말한다. “영화에서 폭력을 다룰 때, 나는 그로 인해 파생된 것들, 피해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두곤 한다. ‘폭력’이라는 쇼에는 전혀 관심 없다.”

꿈틀대는 동물

빌뇌브 감독의 영화에서 동물은 중요한 장치다. ‘프리즈너스’의 후반부, 로키(제이크 질렌할) 형사는 유력한 용의자의 집을 급습한다. 로키는 수상한 상자들을 발견하지만, 그 상자에선 단서 대신 복잡한 미로 그림과 살아 있는 뱀만 쏟아져 나온다. 미궁에 빠진 사건과 그의 복잡한 심경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다.

‘에너미’는 더 공격적이다. 이 영화는 스트립댄서 아래로 기어가는 거미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빌딩 숲이 거대한 거미에 잠식되는 듯한 인서트도 있고, 여인의 육신이 거미로 돌변하는 장면도 나온다. 여기서 아담은 도플갱어의 삶을 탐하는 인물이다. 아담 내면의 욕망이 거미의 꿈틀대는 몸짓으로 거리낌 없이 드러난 셈이다.

에너미

‘컨택트’의 헵타포드는 외계 생명체지만 흡사 문어·거미 같은 동물을 연상케 한다. 특히 루이스가 작전실에서 헵타포드의 환영을 보는 장면은 ‘에너미’의 마지막 장면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순간에 루이스가 겪는 혼란을 쳐다보게 된다. 빌뇌브 감독은 말한다. “헵타포드는 악몽의 세계에서 온 생명체처럼 보이길 바랐는데, 그때 생각난 게 고래·문어·거미·코끼리 같은 동물의 모습이었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담은 풍경

빌뇌브 감독은 익스트림 롱숏을 즐긴다. 사건 현장을 관망하듯 멀찍이 바라보는 이런 숏은, 일반적인 영화에선 대개 장대한 스케일을 보여 주기 위해 기능한다. 그러나 빌뇌브 감독의 롱숏은 영화가 품은 정서와 한 몸처럼 움직인다. 그는 “영화의 의미를 전달하는 방정식의 일부가 풍경”이라 믿는다.

‘컨택트’에서 루이스는 헬기 안에서 처음 셸을 본다. 광활한 목초지 한가운데 셸이 서 있는데, 그 주변은 온통 안개로 자욱하다. 루이스가 풀어내야 할 겹겹의 미스터리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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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트림 롱숏은 ‘시카리오’에도 있다. 극 초반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지대를 훑고 지나가던 화면은, 잠시 후 주택이 아무렇게나 밀집된 시우다드 후아레즈의 빈민가에 가닿는다. 숨을 죄는 이 황량한 풍광만으로도 범죄 도시의 암울함이 전해진다. ‘에너미’에서도 스모그가 잔뜩 낀 빌딩 숲의 모습이 멀찌감치 펼쳐진다. 인물의 억압된 감정과 불안이 도시의 표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빌뇌브 감독의 다음 영화는 34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오는 ‘블레이드 러너 2049’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 미래 세계를 차가운 네온 조명, 산성비가 내리는 회색 도시로 그렸었다.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빌뇌브 감독이 보여 줄 이 디스토피아의 풍경이.

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사진=UPI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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