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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촛불과 태극기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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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정치부 기자

전수진
정치부 기자

“이야, 이거 옛날에 훈련받을 때 불렀던 노래라고!” 감개무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머리 희끗한 어르신이다. ‘진군가(進軍歌)’를 열창하며 태극기를 절도 있게 흔든다. 지난 4일 덕수궁 대한문 앞,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일명 ‘태극기 집회’ 현장이다.

호기심은 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도 죽게 했다지만 이 현장만큼은 내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피부로 느껴보고 싶었다. 지면과 모니터만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그러나 시청역 3번 출구로 나오는 순간 호기심은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구호는 양반, ‘○○○를 처형하라’는 살의 번뜩이는 구호가 미세먼지와 함께 공기를 꽉 채웠다. 무섭다기보다, 피하고 싶은 저열한 살의였다. 성조기를 든 분들도 있었는데, 이분들에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제기했던 ‘한국 안보 무임승차론’에 대한 고견을 구할 수는 없었다. 기자임을 밝히는 순간 반말은 기본, 욕설이 절반인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서울시 도서관이며 인근 커피숍엔 태극기와 함께 초록색 술병을 든 분들이 가득하다. 이분들은 보수가 아니다. 진정한 보수는 보호하고 싶은 가치를 보호하고, 지켜야 할 자산을 지키는, 품격을 유지하는 세력이다. 그날의 광경은 보호 아닌 파괴, 품격 아닌 천박(친박 아님 주의)이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보았다. 진군가를 따라 부르던 어르신 얘기다. 그분은 말했다. “난 사실 박 대통령은 탄핵돼야 한다고 봐. 하지만 요즘 보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느낌이 들어. 억울해서 나온 거야.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태극기 집회 주최 측이 130만 명이 참여했다고 주장하니, 100번 양보해 그 숫자가 맞다고 쳐도, 그들 모두가 비상식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보수인 양 행동하며 반(反)보수적 행태를 보이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촛불도 싫지만 태극기는 더 싫다는 진정한 보수도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올봄 대통령 선거엔 꼭 한 표를 행사할 거라고 믿고 싶다.

시청역 3번 출구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선 촛불집회가 한창이었다. 그사이는 전투경찰들이 막아서 공터로 변했다. 4번 출구를 지나 공터로 향하는데 ‘덕수궁 앞 조각가 아저씨’로 알려진 조규현씨가 돌담에 남겨놓은 서각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서로 협력하며, 참사랑 실천하는 한민족 조국이어라.” 촛불과 태극기 사이, 너무도 쓸쓸한 글귀였다.

전수진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