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소의 눈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 논설위원

양영유
논설위원

어릴 적 농촌에서 소는 가족이었다. 소가 아프면 온 식구의 애가 끓었다. 꼴 먹이기는 아이들 몫이었다. 여름철 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네 시쯤이면 소를 몰고 야산이나 둑으로 몰려나왔다. 소를 풀어 놓곤 찐 옥수수를 먹고 닭에게 줄 간식용 개구리를 잡으며 놀았다. 소가 풀을 실컷 뜯으면 방죽으로 데려가 물을 먹였다. 배가 빵빵해야 칭찬을 듣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먹을 만큼만 먹었다. 소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다.

소의 임신 기간은 280일이다. 쌍둥이를 낳으면 잔치를 벌였다. 자식 공부와 농사 밑천이니 경사였다. 소는 덩치가 커도 겁이 많고 민감했다. 돌산에서 터진 남포 소리에도, 자동차 불빛에도 화들짝 놀랐다. 그때 눈물을 흘리는 걸 봤다. 동물학자에게 물어보니 “놀라 긴장하거나 환경이 바뀌면 생리적으로 눈물샘이 터지는 것”이라고 했다. 감정과의 상관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정이 있는 건 분명했다. 목이 멍에에 짓눌려 진물이 날 정도로 일을 많이 하는 농사철엔 표정이 어두웠다. 고단한 소의 노동은 1970~80년대 경운기가 본격 보급되면서 안락해졌다. 일소는 하나둘씩 사라지고 일 안 하는 사육소로 바뀌었다.

소는 인간에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주고 간다. 그런 소를 인간이 울린다. 지난해에는 정치까지 가세했다. 김영란법 여파로 한우 선물세트가 외면당했고,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에도 끌려 나갔다. 소와 정치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번에는 구제역이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전국의 친우(親牛)들이 위태위태하다. 소는 억울해한다. “비좁은 사육장에서 충실하게 살을 찌워 왔어요. 백신 접종을 거부한 적도 없고 물 백신을 원하지도 않았고요. 주사를 맞으면 식욕이 떨어지고 젖이 덜 나도 제대로 맞았어야 했는데….”

구제역은 확산일로다. 충북 보은과 전북 정읍, 경기도 연천 등 5곳으로 번졌다. 서로 다른 O형과 A형 바이러스가 검출되고 있는데 백신도 부족하다. 벌써 1000마리를 저세상으로 보냈다. 353만 마리를 매몰한 2010년의 악몽이 떠올라 아찔해진다. 소도 물 욕심을 부리지 않는데 인간의 물욕(物慾)의 끝은 어디인가. 미안하다면 총력 방역으로 확산을 막아야 한다. 조류인플루엔자(AI)로 3312만 마리의 닭·오리와 생이별했는데 소까지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 고향 친구네 소들의 우는 소리가 뒤통수를 때린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나요? 다 인간들 잘못이지.”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