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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포수저, 포세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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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팔자에 없는 수저를 하나 얻었다. 이른바 ‘포수저’다. 요즘 돌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증강현실(AR) 게임 ‘포켓몬고’를 남보다 손쉽게 즐길 수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포켓몬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 또 다른 유행어를 빌리면 ‘포켓몬 성지’로 이름난 서울 올림픽공원 근처에 살기에 본의 아니게 포수저 반열에 올랐다. 포세권도 있다. 포켓몬에 역세권이 더해진 용어다.

지난 일요일(5일) 밤 9시 넘어 올림픽공원에 산책을 나갔다. 말로만 듣던 포켓몬고 열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차가운 날씨, 칠흑 같은 어둠에도 공원 내 한성백제박물관·소마미술관 주변에 젊은이 100여 명이 몰려 있었다. 지난 10년 가까이 공원을 다녔지만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고개를 떨구고 스마트폰 화면에 흠뻑 빠져 있는 청춘들의 모습이 기괴했다. 유령처럼 서성대는 그들이 섬뜩했다.

언뜻 지난해 1150만 관객을 동원한 염상호 감독의 ‘부산행’이 떠올랐다. 부산행의 모티브가 된 애니메이션 ‘서울역’도 생각났다. 사회에서 소외된 좀비들이 득실대는 아수라장을 보는 듯했다. 혹시라도 영화처럼 불평등 사회의 그늘이 아닌지…. 물론 50대 중반 먹물 기자의 기우이리라. 몬스터 잡기에 신이 난 젊은이에게 물었다. “혹시 부자가 된 것 같나요.” “아니요, 그냥 재미있어요.”

포수저, 포세권에는 경제적 함의가 들어 있다. 게임마저 돈에, 지역에 따라 갈라지는 세태의 반영이다. 출시 보름 만에 800만 가까운 다운로드를 기록했지만 이를 바라보는 눈에는 일부 불안감이 서려 있다. 중앙일보 ‘시민마이크’에도 걱정의 목소리가 다수 올라왔다. “집 앞에 포켓스톱(아이템 충전소)이 없어서 집에 갈 때마다 우울해한다”(유선욱), “휴대전화 용량이 없어서 포켓몬고를 하고 싶어도 못한다”(조예슬), “포켓스톱도 없으므로, 결국 또 돈 있는 자의 승리라고 변명한다”(정수민) 등이다. ‘흙수저’에 이은 빈익빈 부익부에 대한 또 다른 자조다.

긍정의 측면도 있다. PC방에, 집 안에 갇힌 게임광들이 거리로, 공원으로, 고궁으로 나왔다. 둘씩, 셋씩 짝지어 “야, 여기 두 마리 더 있어” “어디, 어디”라며 즐거워한다. 자녀와 함께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부모도 드물지 않다. 잘 만든 게임의 파워를 실감한다. 우리 손으로 빚은 제2, 제3의 포켓몬고를 기다리는 이유다. 그보다 먼저 무너진 계층 사다리를 세워야 할 테지만 말이다. 포수저란 요상한 말이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을….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