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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의 통화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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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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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가 시작한 통화전쟁은 좀 다르다. 우선 거칠다. 그는 “중국과 일본은 환율시장을 조작했고 우리는 바보처럼 앉아 있었다”고 콕 찍어서 말했다. ‘규칙 파괴자’란 별명답게 국제 관행도 무시했다. ‘(환율은 시장에 맡길 뿐) 정부는 환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에겐 교과서 속 얘기일 뿐이다.

멈춰선 정부, 무관심 정치
무방비로 얻어맞을 텐가

대통령이 강성이면 선봉장은 비둘기파에 맡기는 게 전략적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자신만큼 과격한 피터 나바로(국가무역위원회 위원장)를 선봉에 세웠다. 잘 알려진 대로 나바로는 중국 혐오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책 『중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날』에서 중국을 삼류 국가로 취급했다. “자살하려고 할 땐 중국산 어류나 과일·육류·채소를 먹으면 된다. 사용 금지된 항생제나 부패균·중금속 등으로 잔뜩 버무려져 있다” “중국에선 태아를 쓰레기봉투에 싸서 버린다”고 혹평했다. 나바로는 특히 중국의 보호무역주의와 환율 정책을 ‘인근 국가를 궁핍화하는 이기주의 정책’이라며 비난했다. 나바로는 벌써 트럼프와 찰떡 호흡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트럼프가 중국·일본에 경고하는 동안 “독일이 유로화 가치를 떨어뜨려 미국을 착취하고 있다”며 독일을 정조준했다.

통화전쟁이야말로 승자독식이다. 상품·서비스 전쟁이 재래식 전쟁이라면 통화전쟁은 흔히 핵전쟁에 비유된다. 패전국의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승패에 따라 세계의 경제 질서가 바뀐다. 브레턴우즈 체제와 플라자합의로 막 내린 1, 2차 통화전쟁은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영국은 기축통화국 지위를 뺏겼고,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견뎌야 했다. 시진핑·메르켈·아베도 이런 사실을 잘 안다.

시진핑은 이미 진지전에 나섰다. 지난달 다보스 포럼에서 시진핑은 “보호주의는 자신을 어두운 방에 가두는 것과 같다”며 자유와 개방을 말했다. 트럼프에 대한 경고이자 불퇴전(不退戰)의 의지를 밝힌 것이다. 다보스에서 돌아온 시진핑은 지난주 인민은행의 정책금리를 0.1%포인트 전격 인상하도록 했다. 중국의 금리 인상은 3년 만에 처음이다.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겠다던 기존 정책 방향을 확 튼 것이다. 실물경기가 둔화하고 경제성장이 위축될 수 있다.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위안화 지키기를 선택한 셈이다. 통화전쟁이 본격화하면 ‘위안화 탈출 러시’ 같은 중국판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 그런 상황은 용납할 수 없다. 시진핑의 중국은 안전띠를 단단히 조여 매고 있다.

메르켈의 독일은 정공법을 선택했다. 매파 재무장관 볼프강 쇼이블레를 통해 “유로화 약세는 유럽중앙은행(ECB)의 양적완화 때문”이라며 트럼프의 예봉을 슬쩍 비켜갔다. 아베는 선물 보따리를 준비했다. 10일 미·일 정상회담에서 아베는 ▶미국 내 일자리 70만 개 창출 ▶10년 내 4500억 달러(약 516조1500억원) 시장 조성을 골자로 한 ‘미·일 경제협력 방안’을 내밀 것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조공 외교’다.

우리는 어떤가. 통화전쟁의 충격을 가장 크게 받을 나라가 한국이다. 제 2의 외환위기가 올 수도 있고, 나라가 거덜 날 수도 있다. 그런데 선봉장도, 지휘자도 없다. 정부는 멈춰 섰고 정치권은 탄핵과 대권에만 쏠려 있다. 환율은 경제는 물론 정치·외교의 종합판이다. 원화가치가 낮으면 수출 대기업이 유리하다. 반면 개인 지갑은 덜 채워진다. 대기업 쏠림을 적절히 막아주는 ‘환율민주화’야말로 진짜 정치요, 강대국에 맞서 최고의 국익을 보장하는 ‘적정 환율’이야말로 진짜 외교다. 대권 주자 누구도 이런 고민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고도 “내가 집권하면 무조건 잘살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나는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트럼프발 통화전쟁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전문가들조차 예측을 포기할 정도다. 모든 변수는 트럼프다. 대선주자들에게 묻는다. 원화가치가 얼마면 적정한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 적정 환율을 지키기 위해 트럼프를 상대할 비책은 뭔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