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무명용사 묘에 가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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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인천국제공항에서 9시간을 날아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모스크바에는 그 머나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의 자취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대부분이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로 박헌영.이동휘 등 공산.사회주의자들은 물론 김규식.김승학 같은 민족주의자들의 자취도 있는데, 고비사막을 넘고 유럽을 에돌아 몇달씩 걸리는 먼길을 사양하지 않았던 그들의 자취를 찾다 보면 저절로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특정 도시에서 3일 이상 유숙하려면 아직도 해당 경찰서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따위의 공산독재 시절의 유제(遺制)가 성찰을 방해하지만 이번 모스크바 답사에서 그런 유제들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여기저기에서 한창이던 결혼식 뒤의 풍경이었다.

모스크바 젊은이들이 혼인신고를 마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크렘린 광장 근처 무명용사묘 앞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꽃다발을 바치는 것인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군과 싸우다 죽은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의미였다.

'비록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그대들의 숭고한 희생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쓰여 있는 묘비 앞에 꽃다발을 바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결혼 문화는 비록 냉전시대에 기승을 떨쳤던 국가주의의 잔상이라 해도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임에는 틀림없다. 신혼 남녀들이 기억해 주는 죽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난해 나는 지린(吉林)성 퉁화(通化)현 부강향이란 마을 뒤편에 있는 일곱 독립운동가의 묘역을 찾다가 그만 길을 잘못 들어 생면부지의 만주 시골길을 여러 시간 헤맨 적이 있었다. 때마침 만난 노인이 중국 동포였는데, 부강향의 묘역을 찾는다는 질문에 그는 엉뚱하게도 먼 산을 가리키며 "저기에도 한국 독립군 무덤들이 있다"고 답했다.

촉박한 일정 때문에 그 산에 들르지 못하고 부강향의 묘역으로 향했지만 내게는 아직도 그 독립군들의 무덤 앞에 술 한 잔, 꽃 한 송이 갖다 바치지 못한 것이 부채로 남아 있다. 그 죽음의 덕으로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그 무덤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반도 강점을 국가 간의 조약에 의한 합법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일본이 1965년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대일 청구권 자금 지불에 동의한 데는 아시아의 반공 블록을 만들려는 미국의 종용도 있었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을 없었던 일로 치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은 농축산업 지원과 원자재 구입은 물론 포항제철.경부고속도로.소양강 다목적댐 건설, 수송.시외전화 시설 등에 투자돼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데 한몫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이후 우리 정부에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현재 그 유족들이 받고 있는 쥐꼬리만한 연금은 대일 청구권 자금의 이자 일부일 뿐이다. 더구나 5억달러 외의 모든 보상을 영원히 포기한다는 조항을 삽입해 국가청구권 외의 개인청구권까지 가로막아 놓았고, 일본은 이 조항을 근거삼아 독립운동가들과 강제 징용자들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한.일 정부의 이런 합작으로 독립운동가들과 강제 징용자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아직까지 가난을 대물림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사회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양식도 없는 집단이기주의의 투기장으로 변해버린 근저에는 공(公)을 위해 사(私)를 버렸던 선열들에 대한 망각이 있다.

대부분의 주요 국가 수도 중심부에는 무명용사의 탑이 있는데, 우리가 국립현충원의 임정 묘역 상단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을 세운 것은 지난해 5월이었다.

그나마 그 역사적인 제막식에 3부 요인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국립현충원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런 위령탑의 존재를 우리 국민이 모른다고 타박할 수야 없겠지만.

이덕일 역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