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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출판사 첫 책] 까치 글방 '한국 민족주의의 이념과 실태' (197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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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1977년 가을 도서출판 까치글방을 열 당시 박종만(58.사진)사장은 잡지 '뿌리 깊은 나무'를 1년 반 가량 편집한 것이 출판 경력의 전부였다. 그러나 출판에 대한 사명감은 남달랐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유신 독재가 막바지에 달하던 시기라 독재에 장애가 되는 어떠한 논리도 용납되지 않던 때였다. 당시 유신에 대항하는 논리의 하나가 민족주의였다. 그런 현실에서 박사장이 정성을 쏟아 기획한 책이 차기벽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한국 민족주의의 이념과 실태'였다.

학술서를 많이 펴내 지성계를 이끌겠다는 야무진 포부로 시리즈 이름으로 까치글방을 내걸고 이 책에 1번을 붙였다. 그때는 일본의 이와나미 출판사의 '신서'(新書)를 흉내 내어 인문학 및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시리즈를 내놓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까치글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시리즈가 최근 2백호를 넘었으나 박사장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앞으로는 번호를 매기지 않겠다고 밝혔다.

지은이 차기벽 교수는 근대 역사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산업주의라는 세 바퀴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였다. 30대 초반이던 박사장도 민족주의야말로 민족 분단과 독재의 암흑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라고 굳게 믿었다. 그 책에 담긴 내용이 바로 박사장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발표한 글 중에서 민족주의라는 주제로 묶을 수 있는 글들을 모았다. 편집상 약간의 무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 책을 손에 쥐었을 때 박사장이 느낀 벅찬 감정은 달리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사장은 이 책의 장정이 지금까지 까치글방에서 나온 책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꼽고 있다. 지금까지 7~8천부 팔렸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온 이듬해 봄 개정판을 낸 뒤 차기벽 교수를 찾은 자리에서 박사장은 차교수에게서 섭섭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차교수의 동료들이 왜 이름없는 출판사에서 책을 냈느냐, 장정이 왜 그렇게 형편없느냐는 등 불만을 털어놓더라는 것이다.

제대로 항변도 못하고 연구실을 나서는 박사장에게 대학 교정에 만발한 진달래가 그렇게 서럽게 느껴지더라고 한다. 그 뒤 차교수가 다음 책의 일부 원고를 회수하여 다른 출판사에 넘길 때도 박사장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박사장에겐 이 때의 경험이 꽤 아팠던 것 같다. 박영한의 '인간의 새벽'강석경의 '순례자의 노래'등 국내소설도 출간했으나 1982년부터는 필자들의 '불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번역 출판으로 돌아선다.

까치글방에서 나온 5백여종 중에서 지금도 어느 정도 움직이고 있는 책은 40여종에 지나지 않는다.

왜 출판사 이름이 까치냐는 물음에 박사장은 "외국에 팽귄이라는 출판사도 있고 해서…."라고 대답했다. 박사장은 "길조(吉鳥)라서 까치로 이름을 지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대부분의 나라에서 까치가 길조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어 이름에 담긴 뜻은 퇴색 되었다"고 덧붙였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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