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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부장의 뉴스분석] 부품도 미국서 만들라는 트럼프의 억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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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조립공장으론 충분치 않다. 부품까지 미국 내에서 만들어야 한다.”

나바로 국가무역위장 “완제품 조립으론 충분치 않다”
개도국 부품공장, 일자리 위해 미국에 짓겠다 선포
인건비·땅값 싼 곳서 생산하는 ‘글로벌 공급망’위협

트럼프 정부에서 새로운 보호무역 기조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차원이 다르다. 트럼프 정부의 무역통상 사령탑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국가무역위원회 위원장은 영국 유력지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외국산 부품들로 구성된 ‘미국산 제품’을 조립하는 대형 조립공장을 미국에 유지하는 것만으론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에 좋지 않다”며 “(미국인의) 일자리와 임금 향상을 위해선 국내 공급망에서 이런 부품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쉽게 말하면 멕시코에서 생산되는 포드차 부품 등을 미국 안에서 만들라는 얘기다. 나바로는 미국의 많은 다국적기업이 의존하고 있는 해외의 공급망을 해체하고 미국으로 되가져오는 것이 트럼프 무역정책의 우선사항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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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로가 드러낸 트럼프노믹스의 속내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보다 글로벌 경제에 더 심각한 충격을 안길 수 있다. 1990년대 이래 계속된 글로벌화와 함께 모습을 갖춰온 ‘글로벌 공급망(global supply chain)’을 와해시키고 그 자리에 ‘미국산(made in USA)’을 놓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과 멕시코 등이 부품을 생산하고, 미국·일본 등 선진국이 완제품을 만드는 글로벌 분업체제를 위협한다. 인건비·땅값 등이 싼 곳에서 생산을 맡는 국제무역 논리와 정면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인건비와 지대(地代)는 세계 최고다. 부품을 미국 내에서 생산하는 것은 경제성이 없다. 다국적기업들이 공장을 미국 밖으로 내보내 온 이유다. 트럼프는 세제 지원을 통해 이런 무리수를 현실화하겠다는 생각이다. 수입 부품에 대해선 세금을 무겁게 매겨 미국산 부품을 쓰게 하고, 수출에 대해선 세금을 면제해줘 미국 내 생산의 원가 상승 부담을 상쇄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수출보조금 금지 규정과 충돌한다.

부품에서 완제품까지 모두 미국 내에서 생산하겠다는 것은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의 빗장을 닫아걸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제조업 일자리 자동화로 더 줄었는데…트럼프의 착각

미국을 주된 수출 시장으로 삼아온 각국 경제로선 치명상을 입게 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무엇보다 자유무역의 전도사 역할을 해온 미국의 표변은 세계 무역질서를 보호무역 쪽으로 뒤집는다. 여전히 수출에 목을 매고 있는 한국 경제의 스트레스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보호무역에 집착하는 것은 일자리 때문이다. 트럼프는 여전히 양질의 일자리가 제조업에서 나온다고 맹신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환상일 뿐이다. 미국 경제는 단순 제조업에서 정보기술(IT) 중심인 기술산업 위주로 재편된 지 오래다. 미국의 제조업 일자리는 79년 2000만 명대를 정점으로 내리막이다. 지난해 말 제조업 노동력 인원은 1200만 명대로 50년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같은 기간 제조업 생산은 6.4배로 뛰었다. FT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미국의 제조업 노동력을 줄인 ‘주범’은 자동화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었다고 지적한다.

MIT대 연구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99~2011년 사이 중국산 저가 수출품 때문에 미국에서 사라진 제조업 일자리는 10% 정도밖에 안 된다. 해외 아웃소싱은 완력으로 못하게 할 수 있겠지만, 자동화는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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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트럼프의 구상이 현실 무대에서 원활하게 작동할지는 의문이다. 우선 미국 내 부품 생산 거점이 붕괴된 지 오래다. WTO 룰을 무시하고 보조금을 지원한다고 해도 가격경쟁력을 갖추기엔 역부족일 수 있다.

어쨌든 트럼프의 보호무역 공세는 거침이 없다. 한국 경제로선 대응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 고민이다.

이상렬 기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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