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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참 가입, 로비스트 고용…‘트럼프 리스크’에 재계 각개전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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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미 무역을 하는 국내외 기업 700여 곳을 회원사로 둔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암참)가 요즘 한창 바빠졌다. 암참에 가입하고 싶다는 국내 기업의 문의가 부쩍 늘어서다. 지난달에만 국내 기업 20여 곳이 가입을 신청했다. 암참 관계자는 “예상과 달리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암참을 통해서라도 미국 정·관계 인사들과 인맥을 트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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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관계 인사가 방한하면 암참을 많이 찾는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2014년 방한했을 때 암참 조찬간담회에 참석했다.

지난달 20여 곳 암참 가입 신청
현대차는 작년 말 9년 만에 재가입
SK ‘트럼프 수출품’ 셰일가스 도입
삼성·LG, 미국 공장 확장·신설 검토

제임스 김(한국GM 사장) 암참 회장은 1일 신년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업이 암참에 많이 가입하면 양국 정부에 공정하고 투명한 입장을 더 적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기업이 보호무역으로 상징되는 ‘트럼프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정국 혼란으로 정부의 외교 능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을 감안해 기업 스스로 살길 찾기에 나선 것이다. 지난해 대미 무역수지 1위 흑자 품목인 자동차업계가 먼저 움직였다. 자동차는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불균형’을 지목한 대표 산업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말 암참에 회원가입서를 냈다. 현대차의 암참 가입은 2008년 이후 9년 만이다. 2008년엔 자동차업계 최대 화두인 한·미 FTA 협상이 진행 중이었다.

K&L은 변호사 2000여 명 대형 로비업체

현대차 관계자는 “한·미 양국 경제의 가교 역할을 하는 암참에 가입해 미국과 소통 채널을 최대한 확보하려 한다”고 말했다. 앞서 현대차는 지난달 17일(현지시간) “2021년까지 미국에 31억 달러(약 3조60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5년간 미국에 투자한 금액(21억 달러)보다 50% 늘어난 규모다. 공장 증설도 검토 중이다.

중동산 원유 수입에 의존하던 석유화학업계는 미국산 원유 수입에 나서는 등 이전보다 공격적으로 돌아섰다. SK E&S는 지난 1일 국내 최초로 미국산 셰일가스를 직수입해 연료로 쓰는 천연가스발전소 가동에 들어갔다.

셰일가스는 에너지 수출에 앞장서겠다고 공언한 트럼프의 대표 수출상품이다. SK이노베이션은 자원개발 담당 본사를 미국 휴스턴으로 옮기고 전략·기획 등 주요 부서 인력을 확대 배치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미국 현지 기업과 정보를 교류하고 사업을 확장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직접 미국 현지 로비업체를 고용하기도 한다. 한국무역협회(무협)는 최근 미국 로비업체 ‘K&L게이트’와 3개월 계약을 맺었다. K&L은 변호사 2000여 명을 둔 대형 로비업체다. 이곳 출신 변호사들이 미국 상·하원 의원으로 포진해 로비에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무협이 이곳과 계약한 건 통상정보 입수와 대책 마련, 트럼프 정부 인맥 구축, 우호적 한·미 통상 여론 조성을 위해서다. 무협은 2011년 한·미 FTA 비준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현지 로비업체를 고용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은 ‘몸사리기’전략

장상식 무협 미주실장은 “사안이 예전보다 복잡해져 미국 시각에서 통상정보를 파악해야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현지 로비업체를 고용한 만큼 한국 기업 목소리를 전달하기도 수월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9월 인수한 미국 빌트인 가전업체 데이코의 로스앤젤레스(LA) 생산공장 확대방안을 검토 중이다. LG전자도 미국 테네시주에 가전공장 설립을 고려 중이다.

한 가전업체 관계자는 “인건비가 높아 미국에 공장을 설립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를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반면 ‘몸 사리기’에 들어간 기업도 있다. 17조원 규모의 미국 고등훈련기 교체사업 수주전에 뛰어든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최근 사업 파트너인 록히드마틴으로부터 “한국 기업이 적극 뛰어드는 모양새를 취하면 미국 정부로부터 눈총을 받을 수 있으니 홍보를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KAI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기술력을 자랑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파트너를 뒤에서 돕는 식으로 전략을 바꿨다. 수주할 경우 한국보다 미국 기업에 이익이란 인식을 주는 게 여러모로 낫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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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로부터 마땅한 도움 기대 어려워”

10대 그룹의 한 전략기획 담당 임원은 “트럼프발(發) 통상 압력에 고스란히 노출됐지만 정부로부터 마땅한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대선을 앞두고 있어 ‘기업 때리기’ 분위기다. 미국 수출기업이라면 당분간 어떻게든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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