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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시뮬라크르 #11. 무채 계열의 빨강 (4)

중앙일보

입력

완은 밤이 늦도록 그림에만 몰두했다. 곱던 그 얼굴에도 세월이 깃들기 시작한 지사장을 지우고 주방에서 혼자 울고 있을 여주댁을 지우고, 고물고물 눈에 선한 꼬마 녀석을 지우고 공연히 서글퍼지는 마음까지 지우고, 완은 그림 속 소녀에게만 집중했다. 소녀에게 말을 걸듯 정성껏 그림만 그렸다.
그 밤 이후론 웬일인지 다시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리듬이 깨질까 봐서 산책도 나가지 않고 계속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보름 만에 다 그린 그림을 물감이 마르도록 놔두고 맞은편 작업대에 새 캔버스를 세웠다. 다음 그림은 아예 그동안 마음을 어지럽히던 핏빛 이미지로 가기로 했다. 무채색 도시 위에 뿌려지는 핏빛 혼란은 전쟁일까, 재앙일까.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전에 완은 무채 계열의 빨강을 얻기 위해 여러 물감들을 섞어서 연습용 캔버스에 칠해가며 색감을 봤다. 마음에 꼭 드는 색은, 그러나 나오지 않았다.

지사장은 출장을 다녀와서도 한 번 들르지 않고 계속 전화로만 안부를 물었다. 그림이 다 되어 마르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도 보러 오지 않았다. 언제나 그림이 완성됐다고 하면 한달음에 달려와 보곤 했는데, 뭔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렸는지 건성으로 한 번 들르겠다고만 했다.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아 새 그림도 시작하지 못했다. 사실 완은 자신이 원하는 색이 어떤 색인지 알지 못했다. 며칠 동안 무턱대고 이것저것 섞어가며 살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무채 계열의 빨강이라니 가능하기는 한 걸까. 하지만 꼭 그것이라야 했다.
심사가 어지러워 밤잠을 설치고 새벽부터 산길을 헤맸다.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바로 도시로 나갔다. 화방에 들러 물감을 둘러보며 궁리해 봤지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별 소득도 없이 사람 구경만 실컷 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문 앞을 서성이는 청년을 만났다. 완이 먼저 발견하고 멈칫거리는 사이에 청년도 완을 보고는 제 쪽에서 먼저 다가왔다. 완은 이제 두렵기보다는 귀찮았다.

“자네, 전에도 여기 온 적이 있는가?”

어둠 속에서 뒷모습만 얼핏 봤지만 분명히 같은 차림이었다.

“네.”

“무슨 일로?”

밝은 곳에서 보니 아직 앳된 청년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얼굴선이 고왔다. 바지 자락에 묻은 얼룩은 유화를 그릴 때 쓰는 물감의 흔적으로 보였다.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가?”

“작년에 선생님께서 심사를 보셨습니다.”

“미술 대전 말인가.”

다음 대사는 안 들어봐도 뻔했다. 공모전에 작품을 냈으리라. 그리고 떨어졌겠지. 왜 떨어졌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할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다시 봐 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하고 거절당하고 매달리겠지.

“선생님은 분명히 제 작품을 보셨습니다.”

완은 청년의 눈을 들여다봤다.

“자네 이름이 뭔가?”

눈빛이 탁한지 맑은지, 정신이 온전한지 흐린지 먼저 알아야 했다. 몇 년 전의 무명화가처럼 불쑥 품고 온 칼을 꺼내 휘두르면 곤란했다.

“선생님은 분명히 제 작품을 보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흐린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맑은 것도 같고.

“그런데?”

“선생님이 이번에 공개하신 작품이 그때 낸 제 작품과 똑같습니다.”

짐작과 달랐으나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그림에 매달려 미쳐가고 있는 것과 이미 미친 것과의 차이만 있을 뿐.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나?”

“구도, 색채, 크기까지 똑같습니다.”

완은 청년의 눈치를 살치며 슬그머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검은색 야구 모자를 눌러쓴 그가 야상 점퍼 깊숙이 찔러 넣은 두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작품, 가져와 보겠나?”

청년은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일까.

“봐야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확인해 보자는 말일세.”

돌변하려는 것일까.

“어디가 어떻게 같은지, 증명해 보란 말일세.”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 여기로 가져올 순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

“제 작업실로 함께 가주시면……”

“내가 왜?”

“혹시라도 훼손되면 저는 증명할 방법이 없어집니다.”

“나를 못 믿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시간이 없네.”

“그럼, 내일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러겠나?”

“네, 선생님.”

“기다림세.”

청년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뒤돌아서 갈 때까지 완은 꼿꼿이 서 있었다.
멀어져 가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재빨리 대문을 열고 들어가 빗장을 질렀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면서 이게 무슨 꼴인가 싶어 새삼 부아가 났다.
완은 하루 종일 붓도 들기 싫었다. 정말로 내일 다시 올까 봐 걱정이 되면서 이제라도 신고를 해야 하나 고민도 되었다. 오후 늦게 지사장이 말린 곶감을 잔뜩 사 들고 올 때까지도 완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지사장은 완성된 그림을 보며 연신 찬사를 남발했다.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뉴욕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쩌면 이 그림이 메인이 될 수도 있겠다고 했다. 완은 지사장이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지만 내심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완은 흐뭇하여 저절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자꾸만 헛기침을 해야 했다.

“이 그림에는 몇 개의 시선이 들어 있는 것 같은가?”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지사장에게 물었다.

“시선이라뇨?”

허리를 펴며 지사장이 되물었다.

“일단은 이 잠든 소녀의 시선이 있겠지?”

“아!”

“그리고 저기 부상당한 소년의 시선도 있을 테고.”

“그러네요.”

“이 그림을 그린 내 시선이 있지.”

“그럼 세 갠가요?”

“아니지, 자네도 이걸 보고 있잖아.”

“그럼 네 개?”

“비슷한 시공간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모두 같은 세상을 사는 건 아니지. 자네의 시선과 나의 시선은 또 다를 거야. 이 그림이 다른 어딘가에 걸리게 되면, 거기서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또 하나의 세계가 열리겠지.”
“그럼 모두 다섯 개의 시선으로 만든 다섯 개의 세상인가요?”

“아니지, 다른 누군가도 이 그림을 볼 테니까, 그렇게 무수한 시선들과 세계들이 생겨나는 거겠지.”

“아, 그러네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듯이 저 아이들도 저쪽 세상에서 어떤 형태로든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이쪽이 진짜일까, 저쪽이 진짜일까?”

“음…… 제가 있는 이곳이요. 여기가 늘 진짜 아닐까요? 제가 만약 저곳에 있다면 저쪽이 진짜고요.”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를 중심에 놓고 보는 것이고. 그 모두를 하나하나의 나로 본다면, 어느 곳도 다 진짜라고도, 가짜라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서로를 비추고 비춰주는 거울이거나, 서로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들일 수는 있어도. 그런 의미에서 누가 누구 흉내를 냈다고 해서 어느 것을 진짜라고도 가짜라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군.”

“알 듯 모를 듯하네요.”

“다음 그림은 일곱 개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야.”

“왜 일곱 개죠? 무수히 많다면서요.”

“몰라. 그냥 그 말이 생각났어.”

완은 농담이었다는 듯 지사장을 쳐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지사장이 다시 알 듯 모를 듯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완도 자신이 무슨 말들을 지껄인 것인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형식과 그의 그림을 의식한 궤변일 수도 있었다. 처음엔 그의 그림을 훔쳤지만, 이후엔 스스로 그렸다고, 그 그림들마저 모두 가짜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지사장이 돌아간 뒤, 완은 새삼 열정에 들떠 새로 시작했다. 무채 계열의 빨강이니 하는, 어쩌면 현실에는 없을지도 모를 색에 대한 궁리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아예 그냥 회색이면 회색, 황토면 황토, 빨강이면 빨강으로 명도와 채도를 높여 선명하게 표현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진짜도 가짜도 없는,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거나 서로에게 드리워진 그림자인 세상. 그렇다면 서로 만나거나 겹치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진짜인 줄 알았던 형석의 그림과 흉내 낸 가짜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했던 내 그림이 만나는 지점, 그가 본 세상과 내가 본 세상이 서로 겹치는 부분. 어쩌면 그것은 사실적 기법으로 매우 정밀하게 묘사된 무채색 풍경 위에 덧칠해진 강렬하고 선명한 색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완은 새 그림의 밑그림을 그리느라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도 오후 늦게야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웬 청년이 새벽부터 찾아왔던데요.”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를 식사를 차리며 여주댁이 말했다.

“그래서?”

“돌려보냈어요.”

“잘했네.”

“저녁에 다시 오겠대요.”

“오긴 뭘 와.”

“약속을 하셨다고.”

“무슨 약속?”

완은 여주댁에게 청년이 다시 오더라도 들이지 말라고 일렀다.

“파출소에 말을 해 둘까요?”

“내버려 둬. 그러다 말겠지.”

완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작업실로 올라갔다.
새 캔버스 속 소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팔레트에 부족한 물감을 짜서 채워 놓고 세척액에 담가 놓은 큰 붓을 건져 두툼한 페이퍼 타월로 꼼꼼하게 닦았다. 브라운 레드에 프러시안블루를 약간씩만 섞고 넉넉하게 희석제를 더했다. 큰 붓으로 부드럽게 칠을 해 나가는 그 머릿속에는 이미 지사장도 없고, 뉴욕 전시전도 없고, 청년도 없었다.
완은 폐허가 된 잿빛 도시에 불어닥친 선명한 빨강의 세계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작가 소개   
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소설창작학과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나무젓가락」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제2회 EBS 라디오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단편소설집 『붉은 나무젓가락』, 장편소설 『수목원』,
그림동화 『옥상에 텃밭이 생겼어요』
옴니버스 에세이집『가족이 힘이다』『수업』『가족, 당신이 고맙습니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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