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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팔뚝만한 붓으로 ‘광화문’ 일필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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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어른 팔뚝만한 붓을 거머쥔 두 손에 기가 모이니 종이를 뚫을 듯하다. 원로 서예가 유천(攸川) 이동익(77)씨는 들통에 그득 담긴 먹에 큰 붓을 담근 뒤 숨을 고르고서 ‘빛 광(光)’자를 한 호흡에 내리 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입에서 절로 “좋다” “장하다”란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30일 오전, 서울 인사동 서실에서 신년 휘호로 광화문 현판의 ‘光化門’ 석 자를 쓰는 이동익 선생.

30일 오전, 서울 인사동 서실에서 신년 휘호로 광화문 현판의 ‘光化門’ 석 자를 쓰는 이동익 선생.

30일 오전 서울 인사동 유천의 서실 ‘화산서루(華山書樓)’가 있는 건물의 5층. 이날 정유년 설맞이 휘호는 ‘광화문(光化門)’이었다. 20여 년 전부터 유천 선생을 모시고 글씨 공부를 하는 성균관대 교수 서예동호회인 ‘행연회(杏硯會)’ 회원들이 스승을 졸라 자리를 마련했다. 광화문 광장을 메운 1000만 국민의 뜻을 이야기하던 제자들이 그 의기(意氣)를 기려 광화문 현판을 제대로 한 번 써 보여주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김정탁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민기여춘(民氣如春), 백성의 기운이 봄과 같으니 이에 화답하는 글씨가 살아나면 좋겠다는 진심이 통했다”고 말했다.

원로 서예가 이동익씨 설맞이 휘호
가로 5m 대형 화선지에 힘찬 붓질
제자들 “글씨는 마음의 그림” 공감

유천 선생도 후학들 생각에 동의했다. 그렇잖아도 활자 인쇄체 모양새를 하고 볼품없이 걸려있는 현판이 마뜩찮던 참이었다. 2010년 광복절에 복원된 뒤 논란이 끊이지 않는 광화문 현판은 바탕색상 논란까지 불거지며 ‘원점 재검토’에 들어가 고증 과정에 오류가 있음이 드러난 상황이다.

마침 비어있던 서실 위층 공간에 가로 5m, 세로 1.8m 대형 화선지가 준비되자 유천 선생은 냉기 도는 영하의 날씨에도 얇은 웃옷 차림으로 나섰다. 두툼한 외투를 입고 둘러선 제자들이 걱정하자 “글씨를 쓰면 땀이 날 정도로 후끈 몸이 더워져 추운 줄 모른다”고 했다. 과연 ‘일자견심(一字見心)’이었다. ‘한 글자에 마음이 보인다’는 말이 눈앞에 펼쳐졌다. ‘光(광)’자에 이어 ‘化(화)’자와 ‘門(문)’자가 어우러지니 광화문 광장에 한마음으로 모여들었던 국민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대필(大筆)의 현장을 지켜본 제자들은 새삼 ‘서여기인(書如其人)’ ‘글씨는 곧 그 사람’이란 말을 실감했다고 입을 모았다. 박승희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서설 내린 정유년에 새 기운을 받았다”고 했다. 하영휘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는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라는 선생의 서예론에 동감한다”고 말했다.

오전에만 ‘광화문’ 4장을 쓴 유천은 점심 요기를 마치자 다시 붓을 들었다. 양동이를 채웠던 1000㎖ 먹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는데도 선생의 손은 떨림 없이 강건했다.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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