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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날개가 닿지 않는 새처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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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호 29면

신새벽 재잘거리는 새소리에 잠이 깼다. 문을 열었더니 세상은 온통 설국이었다. 지붕과 마당, 돌담과 장독대에도 흰 눈이 소복소복 덮여 있었다. 장독대의 항아리들은 쌓인 눈 때문에 키가 한 뼘은 더 커보였다. 집 바깥으로 나갔더니 앞길은 누가 벌써 쓸어놓았다. 경로당 앞까지 눈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는데, 문 앞에 작은 눈사람 하나가 솔방울 눈동자까지 달고 서 있었다. 누가 만들어 세웠을까? 동네엔 아이들이라곤 없는데, 혹 장난기 있는 노인들이? 정말 오랜만에 보는 눈사람이 무척 정겨웠다.


정오쯤 되자 반짝 해가 났다. 날씨도 포근했다. 늦은 오후 모처럼 개를 끌고 산책을 나섰는데 경로당 앞에 세워져 있던 눈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다 녹아버린 걸까. 내가 세운 건 아니지만, 있던 것이 사라진 공간은 허전했다. 문득 ‘환영(maya)’이란 말이 떠올랐다. 환영이란, 공상이나 환각에 의해 눈앞에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그래, 오전에는 내 눈앞에 있다가 오후 되어 사라진 눈사람이야말로 환영의 힘을 보여주는 멋진 상징이군!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경로당을 나서는 마을 부녀회장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물었다. “여기 눈사람이 있었는데, 어디로 간 거죠?” 넉살 좋은 부녀회장은 성긋벙긋 웃으며 대꾸했다. “아, 그거 우리 할마씨들이 심심풀이로 맹글었는데, 해님이 다 잡숴버린 모양이우.” “하하…해님이오?” “고선상, 사는 게 그렇게 허망하다우. 그런데 TV뉴스를 보니, 그걸 모르는 딱한 사람들도 있더라구!”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돌아오며 부녀회장이 말한 딱한 사람들이 누군지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무슨 돈이나 권력, 지위나 명예도 때가 되면 눈사람처럼 허물어져버리는 것인데, 그것에 집착해 국정을 농단한 밉광스런 인간들.


19세기의 인도 성자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신만이 영원한 실재이며 다른 모든 것은 환영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슬람의 수피들도 동일한 인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영원한 실재인 신을 아는 것이 모든 지혜의 으뜸이라 설파했고, 예수 또한 ‘내가 추구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왜 위대한 종교문헌들은 모두 세상을 환영으로 보는 것일까. 한 철학자는 그것을 ‘전략’으로 본다.


세상은 분명히 우리에게 경험되기 때문에 환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환영으로 간주하는 까닭은, 이 세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라는 것. 즉 세상이 환영이라고 말함으로써 덧없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게 만들어서 더 가치 있는 것에 몰입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


더 가치 있는 것이라니? 우리 생의 궁극적 실재인 신을 탐구하는 일이든지, 세속적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환영의 세상에 얽매일수록 우리의 삶은 무거워지지 않던가. 새들은 뼛속이 비어 가볍게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한다. 종교들이 일러주는 환영론은 욕망의 뼛속을 비우라는 거 아닐까. 세상 위로 날아가면서도 세상에 날개가 닿지 않는 새처럼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닐까.


고진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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