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데까지 가지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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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꼭 한달이 걸렸다. 민정·민주당은 1백12개 항목이나 되는 쟁점들을 풀고 「합의개헌」에 합의했다.
앙앙불락(앙앙불락), 엊그제까지도 그랬던 여야인데, 용케 고비를넘겼다. 그만하면 잘된 협상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게 머리를 맞대면 될 일을 무슨 까닭에 몇년 몇달을 두고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는 말인가.
매사가 마찬가지다. 정치도, 경제도, 세상사 모두가 갈데까지 가야만 돌파구가 뚫리는 요즘의 세태는 기가 차다.
오늘의 합의개헌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고통과 돈과 에너지가 소모되었는가. 그동안 감옥에 간 사람은 몇이며, 알게 모르게 쏟아 부은 국가예산은 또 얼마겠는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다. 그 극한상황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피가 마르는 심정은 지금 어떻게 표현해야 옳은가.
「갈데까지 가보자」는 독선과 아집은 비단 정치만이 아니다. 요즘의 노사분규도 꼭 그런 식이다. 쟁의가 났다하면 벌써 데모가 일어나고 머리띠에 과격구호와 스크럼이 등장한다. 한쪽에선 화염병이 날고, 회사기물을 때려 부수고, 화형식도 벌어진다. 그야말로 갈데까지 가보자는 식이다.
그러자니 노사 모두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할 것이며, 물질적 소모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갈데까지 가서 겨우 매듭이 풀려도 그 상흔은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갈데까지 갔던」일들이 하루아침에 씻은듯이 잊혀질리는 만무다.
우리 민족은 원래 여유가 있었다. 그림을 그려도 공간과 여백과 생필을 보여주었다. 한구석 눈과 마음이 쉴자리를 비워놓는 것이다.
한복은 뭐니뭐니해도 풍성한 멋이 제격이고, 집을 지어도 여유가 있다. 대들보는 자귀로 대충대충 다듬고, 문짝도 엇비슷하게 맞으면 그만이다. 한 눈금, 한 치수를 따지는 일본식 집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그런 적당 주 의가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한숨 돌리는 여유가 세상을 얼마나 편하게 만드는가. 정치가 그런 경지에 이르면 국민의 마음도 한결 편안할 것이다.
가슴 죄고 철렁하는 일들은 이제 그만 보았으면 좋겠다. 남들은 21세기다, 선진국이다 하는데 우리는 언제나 갈데까지 가보는 극한의 정치, 극한의 경제를 경험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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