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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 설 귀성길을 즐겁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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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 도시락 싸고 소풍길

고3.고1 남매를 둔 주부 이혜숙(44)씨는 일 년에 두 차례 명절 귀성길을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한다. 고향인 전북 김제까지 7~8시간은 꼼짝없이 차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아이들이 크면서 평소 집에서도 마주할 일이 적은 이씨 가족으로선 흔치 않은 MT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우선 도시락을 정성스레 싼다. 평소 학교 급식을 먹는 아이들에게 '엄마표' 도시락은 별미 중 별미. 커피도 입맛에 맞게 타 보온병에 담고, 뜨거운 물과 컵라면도 챙겨간다. 후식으로 먹을 과일도 준비한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도시락을 먹다 보면 가족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다고.

이동시간은 100% 대화의 시간이다. "서로 마주 보지 않고 함께 앞을 보며 가기 때문에 부담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다"는 게 이씨의 설명. 이성 친구 얘기도 하고, 부모가 어렸을 때 얘기도 하고, 재미난 이야기도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이때 주의사항 한 가지. 아이들에게 교훈을 전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촌형 아무개가 이번에 어느 대학에 갔다던데 이번에 만나면 공부방법 좀 배워라"는 식의 말도 금물이다. 한국청소년상담원 이호준 선임연구원은 "그동안 못했던 잔소리를 몰아서 할 기회로 쓰면 안 된다"며 "장거리 여행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 장난을 친다든지, 창문을 올렸다 내렸다 한다든지 하면서 부모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많이 하는데 이를 너무 확대 해석해 아이 인성을 바로잡아야겠다고 나서지 말라"고 조언했다.

부부 대화의 시간으로도 유용하다. 차라는 좁은 공간이 깊은 대화를 나눌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주부 김윤희(43)씨는 "아이들이 지쳐 잠들면 그때부터 남편과 대화를 시작한다"며 "이야기 주제는 아이들의 장래, 그동안 아빠가 몰랐던 아이들의 새로운 면, 아이들의 고민, 나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 노후 계획 등"이라고 밝혔다.

# 차 안은 게임천국

중앙일보 패밀리 리포터 김은주(37)씨는 집을 나서기 전 초등학생인 두 딸과 함께 놀이 준비물을 챙긴다. 인형.스티커.노래테이프 등이다. 자석판으로 만들어진 오셀로 게임 도구를 가져가면 차가 흔들리는 데 상관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도구 없이 즐겨하는 게임은 스무고개, 빙고게임, 끝말잇기, 수수께끼 등이다. 특정 동화책에 나오는 인물 이름 대기도 재미있다.

영어로 단어 이름 맞히기 게임도 히트 아이템이다. 한 사람이 단어에 대한 설명을 영어로 하면 다른 사람들이 맞히는 게임으로, '콩글리시'가 이어져 웃음이 터진다. 앞차 번호판을 이용해 구구단 게임이나 암산 게임을 하기도 한다. 번호판 숫자를 모두 더해 끝자리가 '0'인 차를 찾는다든지, 앞차 번호판 숫자에 +, -, ×,÷ 등을 적절히 이용해 숫자 '10'을 만들어 본다든지 하는 게임이 가능하다.

노래 부르기도 단골 메뉴. 아예 노래 한 곡을 마스터할 기회로 활용하기도 한다. 주로 영어 노래나 최신가요가 대상이다. 대여섯 시간 돌아가며 부르다 보면 가사.음정.박자 모두 몸에 딱 밴다.

조전순(42)씨 가족(사진)은 팀을 나눠 '쟁반 노래방'게임도 한다. 노래 하나를 어느 정도 익혔다 싶으면, 부모팀.자녀팀으로 나눠 어느 팀이 가사를 틀리지 않고 부르는지 겨뤄보는 것. "차 속에서 연습한 덕분에 명절 때 모인 친척끼리 노래방에 가면 우리 가족이 단연 인기"라고 말했다.

# 주의! 부부싸움

명절엔 부부싸움이 일어나기 쉽다. 아내나 남편이나 모두 명절 스트레스에 치여 심신이 피곤한 상태여서다.

중2.초6 남매를 두고 있는 주부 김현영(가명.42)씨. 지난해 추석 귀성길 생각을 하면 아직도 기가 막힌다. 장거리 운전인 만큼 남편과 교대운전을 하고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서로 운전솜씨를 못마땅하게 여겨 잔소리를 주고 받으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급기야 옆 차와 신경전을 벌이며 과속을 하는 남편에게 몇 마디 퍼부은 김씨. 남편은 신호등 앞에서 차를 세운 뒤 내려버렸다. 엉겁결에 핸들을 잡게 된 김씨는 사과할 마음에 아이들을 시켜 전화를 걸어봤지만 남편은 받지도 않았다. 화도 나고, 걱정도 되고, 시어머니에게 어떻게 말씀드릴지 난감하기도 하고…. "시댁에 도착해 기절할 뻔했죠. 남편이 미리 와 있더라고요. 퀵서비스를 불러 오토바이 뒤에 타고 왔다더라고요."

인천에 사는 황시연(가명.41)씨는 시댁에서 명절을 쇠고 올라오는 길에 대판 싸움을 벌인 경우다. 손이 빠른 황씨는 음식 준비를 도맡아 하다시피 해 녹초가 된 상황. 귀경길에 지역특산물을 사갖고 친정에 들르자고 제안했더니 웬걸. 남편은 신경질적으로 "피곤한데 오늘은 그냥 가고 처가엔 다음에 들르자"는 게 아닌가. 화가 난 황씨가 "나 내리겠다"고 하자 남편은 정말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워버렸다. 황씨는 자존심을 꺾고 집에까지 차를 타고 왔지만 싸움 후유증은 1주일을 넘겼다.

가정문화원 김영숙 원장은 "자기 부모를 만나러 가는 쪽에서 상대편을 배려해야 한다"며 "한쪽에서 감정이 격앙돼 있으면 다른 한쪽이 살짝 꼬리를 내리는 게 현명한 처신"이라고 조언했다. 또 "자녀 앞에서 부모가 싸우는 것은 아이들의 마음에 큰 짐과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덧붙였다.

글=이지영 기자 < jylee@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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