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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힘 모아 통일도 이뤄야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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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독립운동가 박기성옹(83)이 독립기념관을 찾아가는 날은 날씨도 모처럼 활짝 갰다. 창 밖으로 흐르는 짙푸른 8월의 산하를 바라보며 노옹은 감회에 잠겼다. 「독립 위해 중국대륙 달리던 청년/이제는 백발이 무거운 노인되었네/광복된 조국에 40해 넘겨 살았으나/통일조국 보아야 깊은 잠들겠네」 고쳐 다듬은 한시를 설명하면서 박옹은 「통일」을 더 힘줘 강조했는데 그러면서 조용히 창 밖을 내다보는 그의 표정은 숙연하였고 또 막막하였다.
『규모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더 빨리 만들어져야했던 것인데…』라고 말하면서 박옹은 독립기념관을 두루 살펴보았다.
『45년 8월15일 해방되던 날 우리가 어땠는지 알겠나? 그때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는 이웃해 있었는데 모두가 한숨을 푹푹 쉬었단 말이야. 일본을 우리 손으로 때려 누르지 못했다고 해 가지고서는 말이지.』 충북진천이 고향인 박옹은 16세 때 고학을 하겠다고 일본 동경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나라 없는 백성의 슬픔을 통감하고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 상해로 향했다. 상해에서 그는 젊은 독립투사들과 함께 유길공사암살사건에 가담한다.
『7명의 청년이 모여 유길암살을 계획했는데 모두가 서로 나서겠다고 했지. 죽을 길이 뻔한데 말이야. 결국 요즘식으로 하면 추첨을 해서 이강훈의사 등 2명이 맡기로 했지.』 유길암살사건 등 독립운동을 하던 박옹은 군사적 실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 중국의 사관학교인 중앙군관학교에 들어가기로 졸업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만들고 서안으로 가서 우리청년을 모병했다. 광복군이 창설되자 제5지대에 편임, 중경총사령부정보참모부장을 지냈다.
박옹은 광복된 조국에 42세에 돌아와 43세에 늦게 결혼, 1남 3녀를 두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서「겨레의 집」앞 난간에 앉은 박옹에게 넌지시 민주화에 대해 물었다.
『나로 말하자면 생각은 간단하단 말이야. 조국의 한줌 흙을 애타게 그리워했었지 않아. 그런데 그 흙이 갈라졌단 말이거든. 그러니 빨리 통일되어야지요. 그러자면 민주화가 되어서 더 커진 국민의 힘으로 통일을 추구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목천=임재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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