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징벌적 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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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작은 사막도시 힝클리에 사는 에린 브로코비치. 세 아이에 16달러의 은행 잔액밖에 없는 이혼녀다.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파산선고까지 받았다. '목구멍이 포도청' 상태이던 그녀는 차 사고로 알게 된 법률사무소를 무턱대고 찾아갔다. 잡무를 처리하던 1992년의 어느 날, 이상한 의료 기록들을 발견했다.

인구 650명의 힝클리에서 전력사업을 하는 대기업 PG&E사의 공장이 크롬 성분이 있는 오염물질을 대량 방출, 수질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질병에 걸린 주민들은 이 회사에서 치료비를 받으며 심각한 문제에 입을 닫았다. 에린은 주민들을 설득했다. 600여 명에게서 위임장을 받아내 자산 280억 달러의 PG&E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힝클리 주민 대(對) PG&E 사건'이다.

4년 뒤 PG&E는 미국 법정 사상 최고 배상액인 3억3300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에린을 열연한 줄리아 로버츠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 영화의 내용은 미국 로스쿨(법률전문대학원)에서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제도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17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됐다. 악의적.반사회적.비도덕적인 가해자의 불법 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도입했다. 실제 손해배상 외에 추가적으로 형벌적 성격의 엄청난 손해배상액을 물리는 제도다. 미국에서는 1791년 뉴저지주 법원에서 첫 판례로 확립,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미식 축구 스타 출신의 O J 심슨 사건도 징벌적 손해배상의 대표적 사례다. 97년 2월 미국 샌타모니카 지방법원은 피살된 전처의 가족 등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심슨에게 3350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전처 살해 혐의로 기소된 형사사건에서는 무죄가 나왔지만 민사소송에서는 사실상의 '유죄'를 인정한 것이다. 실제 손해액은 850만 달러에 불과했다. 나머지 2500만 달러는 "사망에 책임이 있다"며 매긴 징벌적 배상액이었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을 추진키로 했다. 유괴.횡령.음주운전.명예훼손.환경파괴 등 반인륜적.반사회적 범죄를 단죄하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음미해 볼 만하다. 하지만 손해배상이 무서워 제약업체가 에이즈 백신 등 새로운 물질의 개발을 꺼리는 등의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 자칫 국민에게 엉뚱한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점도 참고하길 바란다.

고대훈 사건사회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