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열며

반미 오케스트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그는 여러 모로 뉴스 메이커다. 이틀 뒤 취임할 그는 남미의 원주민인 인디오 출신 첫 대통령이다. 당선자 자격으로 그는 신년 벽두에 남미는 물론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중국까지 순방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든,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든, 그는 누구를 만날 때도 양복을 입지 않았다. 안데스 산간에서 풀을 뜯어 먹고 사는 알파카의 털로 짠 스웨터를 입었다. 이 지역의 또 다른 산물인 가죽 점퍼를 걸치기도 했다. 자기 것을 사랑한다는 제스처였지만 외교 관례로는 한참 파격이었다.

그는 요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찰떡 궁합이다. "침략과 살인을 일삼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야말로 '악의 축(axis of evil)'이다. 이에 맞서 우리는 '선의 축(axis of good)'을 구축할 것이다." 그는 연초에 차베스 대통령을 방문해 이렇게 한목소리를 냈다.

마침 남미엔 요즘 적이 의미 있는 좌파 바람이 불고 있다. 에콰도르.니카라과 등 중남미 9개국이 올해 대선을 치르는데, 여러 곳에서 좌파의 득세가 점쳐지고 있다. 멕시코에서도 요즘 중도 좌파 후보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외신은 전한다. 7월 2일 멕시코 대선에서 지금의 여론조사 결과가 현실이 되면 남미의 반미 바람이 미국의 턱 밑까지 들이치는 형국이 된다.

이 대륙의 맹주를 자처하는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도 올가을 재선을 앞두고 과거의 좌파 노선으로 회귀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며칠 전 실시된 칠레 대선의 결선 투표에서 승리한 미첼 바첼렛(54.여)도 부드럽긴 하지만 일단 좌파로 분류된다. 아르헨티나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지난해 말 국제통화기금(IMF) 차관을 다 갚는다고 선언하면서 앞으로는 좀 더 자신 있게 '좌회전'할 의향을 내비쳤다.

구경만 하던 미국이 이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 국무부의 중남미 담당 차관보 토머스 샤논이 최근 브라질로 날아갔다. 바람이 얼마나 센지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한 브라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는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당선자,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와 실용적 관계를 맺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반미, 반부시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3국에 한마디로 친하게 지내자며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겁주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중남미 지도자들이 미국과 협력하길 거부한다면 큰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중남미에서 반미는 곧 고립을 의미하며, 반미주의를 내세우는 나라는 미국보다 훨씬 더 큰 손해를 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다고 이 정도에 바람이 고개를 숙일 것 같지는 않다. 남미의 반미 바람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불만에서 싹이 텄다. 미국식 세계화로 불평등과 빈부 격차가 오히려 커졌다는 것이다.

'반미 오케스트라'를 울리는 남미와, 이것은 음악도 아니라며 볼륨을 낮추려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기 싸움이 볼 만하다.

심상복 국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