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진기자의맛난만남] 국회의원 박영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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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밥 한 끼 함께하자"고 청한 것은 그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글 때문이었다. 홈페이지를 방문한 손님들 앞으로 남긴 인사말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정치인으로 입문하면서 정치란 '음식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의견을 예쁘게 담아서 먹음직한 음식을 만들고 국민 여러분의 에너지를 만드는 일…." 20여 년간의 방송기자 생활을 접고 정계에 입문한 지 3년째. 그동안 그가 펼쳐둔 그릇에 어떤 음식들이 담겨졌을지가 궁금했다.

글=신은진 기자 <nadi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같은 밥과 반찬이라도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 맛있어 보일 수도 있고, 반대로 먹기 싫어질 수도 있다. 정치가 꼭 그렇다."

하얀 접시 위에 잘 삭힌 홍어가 탐스럽게 놓였다. 삶은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 갖은 밑반찬이 상 위에 차려지는 모양을 보며 그가 말을 잇는다. "국민에게 욕 먹지 않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담는 방법을 모르거나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섞는 바람에 원래의 맛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똑같은 음식으로 완전히 다른 맛을 낼 수 있다는 걸 나도, 다른 정치인들도 잘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큼직하게 찢은 김치로 돼지고기와 홍어회를 겹쳐 감싼다. 묵직하고 텁텁한 고기와 홍어 특유의 톡 쏘는 얼얼함, 매콤하고 개운한 김치 맛이 입 안에서 한데 어우러진다. 제 각각의 맛이 모여 색다른 풍미를 내는 것이 바로 삼합. 이 미묘한 맛의 조합을 제대로 살리는 집이라 3년 전부터 단골이 됐다. "특히 이 집 김치 맛은 최고"라고 칭찬을 한다. 파김치.갓김치.고들빼기와 묵은지, 갓 담근 생김치까지 삼합에 곁들여 나온 김치 종류만 다섯 가지다. 전라도 화순에서 고추와 참기름, 순천에서 멸치젓을 가져와 직접 담근 것을 1년에서 4년까지 푹 묵혀 내놓는단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다. 한식을 주로 찾는데, 태국이나 인도요리처럼 이국적인 음식도 좋아한다. 입맛에 맞으면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우는데, "그래서 살이 안 빠진다"며 웃는다. 국회의원이 되고부터 즐거움이 하나 사라졌다. 기자 시절에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면 "된장찌개가 좋을까, 자장면이 좋을까"하고 저녁 메뉴를 고르곤 했는데, 지난 2년 동안은 단 하루도 이런 '행복한 고민'을 할 여유가 없단다. 개인 생활이 없다는 게 정치를 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다.

몇 년 전 만해도 자신이 정치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래에 대한 계획은 시사토론 프로그램을 맡고 싶다, 잔잔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등 방송에 대한 욕심이 전부였다. 2년 전 방송사에 사표를 내고 열린우리당의 대변인을 맡게 된 것은 "빚을 갚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말한다. "나는 78학번, 소위 말하는 '386세대'다. 그런데 땡볕에 나가 데모하는 학우들과 함께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그때 힘을 보태지 못했다는 사실이 항상 마음에 남았다." 깨끗한 정치를 위해 노력하면 당시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고 설명한다.

"생각보다 보람있는 일"이라고 이제까지 겪은 '정치'를 평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회에서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기자 시절과 비슷하다. 하지만, 언론이 간접적인 압력에 그친다면 정치는 직접 바람을 일으킨다. 의원 한 사람이 어디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법이 바뀌고 사회적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 지난해 그는 삼성의 금산법(금융산업구조개선법) 위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 '국감 스타'로 떠올랐다. "법망을 피해가는 대기업 때문에 국민의 짐이 무거워지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성역처럼 취급됐던 삼성의 지배 구조 문제가 그의 목소리를 타고 공론화됐다.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땀 흘린 보람이 있어 힘을 얻었다. 그래서 정치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단다. "물론 그 보람만큼 겪어야 할 희생과 의무는 무겁다"고 단서를 덧붙인다.

삼합 그릇이 치워지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뚝배기가 놓인다. 전남 벌교의 별미라는 짱뚱어탕이다. 갯벌에서 잡은 짱뚱어를 갈아 시래기.된장과 함께 푹 끓였다. 추어탕과 비슷한 듯 싶지만, 더 고소하고 담백하다. "기력이 없을 때 먹으면 피곤이 풀리고 기운이 나는 보양식"이라며 그가 식사 메뉴로 추천했다. 밥을 먹은 뒤 나오는 구수한 누룽지도 꼭 맛을 보라고 당부한다.

아직 '새내기'라 할 수 있는 초선의원이지만, 다음달 열릴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 여러 번 출마 권유를 받을 정도로 당내 입지를 굳혔다. 높은 대중적 인지도와 국감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그 자신은 "아직 '발효'가 안 됐다"며 고개를 슬슬 젓는다. '프로페셔널한 정치인'으로 비춰지는 것에 아직은 자신이 없다는 것.

"맛이 제대로 나는 데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아삭거리는 풋김치는 신선하긴 하지만, 푹 묵은 김치의 깊은 맛을 따라갈 수 없는 것 아니겠나."

*** 박영선 의원이 소개한 토속음식점 '포도나무'

묵은 김치와 삼합·짱뚱어탕으로 유명한 남도 음식 전문점. 전남 광주에서 11년간 장사를 하다 4년 전 서울로 올라왔다. "푸짐하게 차려지는 밑반찬에 젓가락질만 몇 번 해봐도 이 집 맛의 깊이를 알 수 있다"는 게 단골들의 칭찬이다. 갓김치·파김치·고들빼기 등 각종 김치와 젓갈류는 따로 주문해 사 갈 수 있다. 짱뚱어탕 1만원, 낙지꼬지 2만원, 삼합·낙지·왕새우구이 등이 나오는 코스메뉴 1인당 4만원. 서울 연희교차로에서 수색·모래내 방향으로 100m 정도 내려가 첫째 우측 내리막길로 20m. 02-32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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