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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폐지 비싸게 산 뒤 재활용해 돕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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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소셜벤처 ‘러블리페이퍼’ 기우진 대표
폐박스로 만든 캔버스엔 재능기부 그림
수익금으로 어르신에게 먹거리 등 전달

기우진씨는 “폐지에 스토리와 의미를 담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 [사진 우상조 기자]

기우진씨는 “폐지에 스토리와 의미를 담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 [사진 우상조 기자]

소셜벤처 ‘러블리페이퍼’ 기우진(35) 대표는 노인들이 주운 폐지를 비싸게 사들인다. 일반적으로 재활용업체에서 10㎏에 700원씩 주는 폐지를 기씨는 10배인 7000원을 주고 매입한다. 그래도 그의 사업은 손해를 보지 않는다. 폐지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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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블리페이퍼는 노인들에게 산 폐지 박스를 재활용해 캔버스를 만든다. 폐지는 자원봉사 예술가들의 손을 거치면 멋진 그림이 그려진 인테리어 소품으로 변신한다. 작품을 팔아 번 돈은 다시 노인들이 주운 폐지를 사는 데 사용한다. 재활용품에 가치를 더하는 ‘업사이클링’으로 노인들을 돕는 것이다.

기씨가 폐지를 줍는 노인을 돕기로 결심한 것은 2013년 여름이었다. 인천의 한 대안학교 교사이기도 한 그는 출근길에 우연히 폐지 박스를 끌고 가는 노인을 마주쳤다. 힘겨워하는 노인의 모습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기씨는 “그 무렵 노인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보고 나서 본격적으로 뭔가 해 보자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그해 10월, 기씨는 봉사단체인 ‘굿페이퍼’를 만들었다.

굿페이퍼는 폐지를 판 수익금으로 가난한 노인들에게 먹거리나 난방시트 등을 전달하는 활동을 했다. 매달 한 번씩 직접 트럭을 몰고 폐지를 모으러 다녔다. 인천지역 학교·교회·가정에서 폐지를 기부받았지만 한 달 수익금은 10여만원에 불과했다. 기씨는 “학생·시민들이 나눔에 참여하고, 폐지 노인의 실상을 알린다는 의미는 있었지만 수익이 적어 실질적 도움에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기씨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후배 권병훈(32)씨와 함께 러블리페이퍼를 설립했다. 우선 폐지를 공급해 줄 노인을 찾으러 길거리를 누볐다. 형편이 어려우면서도 꾸준히 폐지를 모으는 노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물상 앞에서 만난 노인에게 갑자기 “폐지를 사 드리겠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 십상이었다. 기씨는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면서 인사하고 말벗이 되는 게 우선이었다”고 말했다.

3개월만 해 볼 예정이었던 러블리페이퍼는 1년간 지속됐다. 박스 1장이면 캔버스 6개를 만들 수 있었고, 캔버스 하나를 1만원에 판매하면 큰돈은 아니어도 지속적으로 노인들을 도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박스로 만든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줄 재능기부 예술가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모았다. 현재 러블리페이퍼가 꾸준히 폐지를 공급받는 노인은 3명이다. 수익금은 7명의 노인을 지원하는 데 사용한다. 기씨는 “지금은 모든 걸 수작업으로 하지만 앞으로 좀 더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 더 많은 노인을 지원할 생각이다. 최근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사회적 기업가 육성사업에 선정돼 본격적인 사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러블리페이퍼는 최근 선인장을 마스코트로 정했다. 기씨는 “사막의 선인장처럼 노인들이 척박하고 힘든 삶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글=남윤서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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