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불통’의 리더에겐 감히 물어보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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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전영선 산업부 기자

전영선
산업부 기자

“감히 그걸 누가, 어떻게 물어봐요”

자칭 타칭 글로벌 기업에서(물론 본사는 한국), 그것도 중책을 맡고 있는 담당자가 이렇게 답하면 말문이 막힌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듯, ‘사실이다’, ‘사실이 아니다’로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울 수는 있다. 하지만 “확인해 줄 수 없다”도 아닌 "물어볼 수 없다”니. 아마 그만큼 기업 내부에서 정보 공유가 원활하지 않다는 고백일 것이다. 해명되지 않은 찜찜한 팩트는 결국은 시간 차를 두고 폭탄이 돼 돌아온다. 최순실씨 국정 농단 사건 국면에서 박근혜 대통령과의 대기업 총수의 독대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던 기업들은 결국 청문회까지 치러야 했다.

기업을 대표해 외부에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이들의 고충은 다양할 것이다. 그중 민감한 사안으로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은 한국 기업 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자기 목을 걸고 최고경영자에게 그걸 물어볼 사람이 있을까요”라 는 사람에게는 뭐라고 다시 질문을 해야 할지 참 난감하다.

불분명한 기업 정보는 단순히 언론의 취재 불편에서 그치지 않는다. 기자는 그럴 경우 다양한 경로를 통해 더 알아보고 조각을 맞춰가는 길을 택할 수 있다. 문제는 해당 조직 내부 구성원의 동요다. 자신이 속한 조직 내 불통에 대한 구성원의 불만은 ‘윗분들’의 생각보다 훨씬 강렬하다. 왜 멀쩡한 회사원들이 익명 블라인드와 같은 곳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전파하는 데 열정을 쏟으며 시간을 보내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어느 조직이나 공식 라인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가 미흡할 때, 그리고 미화된 것이라 판단될 때 비공식 라인이 더욱 활기를 띈다. 비공식 채널에선 팩트에 살이 붙고 소문에 상상력이 가해져 팩트를 압도하는 경우도 많다. 원칙보다 비선(秘線)이 나를 보호할 것이라고 믿고 충성하게 되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 부분이 전체의 모양을 빼다 닮는 프랙탈 구조처럼 한국 사회에서 불통으로 인한 부작용은 비단 청와대 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리더의 공식 언행이 아닌 그 속에 숨겨진 의중을 파악해 움직여야 할 때가 많다. 의중은 다시 비선을 통해 전달되고,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는 무능함 혹은 불경함으로 찍어 내린다. 이런 문화 속에서 진심으로 목표를 공유하고 함께 하는 팀 플레이가 나올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연초 발표된 주요 기업 신년사에 가장 많이 등장한 키워드는 위기 극복, 혁신과 함께 소통이었다. 물어볼 것은 속시원히 물어볼 수 있고 답할 것은 답하는 소통의 기본이 조금은 지켜지는 한해가 되길 바래본다.

전영선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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