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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봉사하는 행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주민의사 무시한 공영개발 결사반대』『공영개발 구실삼아 국민희생 강요말라』―.
지난2일 상오11시 과천정부 제2종합청사 안내동.
열차편으로 집단상경한 대전 둔산개발지구 땅주인 3백50여명이 건물기둥에 갖가지 플래카드를 둘러치고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대전시가 83년 둔산지구 2백40만평의 사유지를 매수, 택지를 만들겠다고 해놓고 4년이 지나도록 보상도, 착공도 하지 않아 재산권행사를 침해당하고 있다고 주장, 그럴바엔 『공영개발을 취소하고 토지구획정리방식으로 하든지 당장 시가 보상을 하라』며 건설부장관 면담을 요구했다.
이들은 저녁늦게 현장에 나온 건설부장관과 1시간반에 걸친 격론끝에 『긍정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돌아갔다.
결국 지역개발사업을 하면서 해당 주민들의 의견을 묻지 않은 「일방적 행정」이 이들을 새벽길에 상경해 정부청사에 삿대질을 하게 했다.
정부가 청사진을 내세우면서 행정력으로만 밀어붙이는 독선은 어떤 형태로든 반발을 부르고 부작용을 낳는다.
바로 그 행정의 시행대상이면서, 정책 결정과정에서 소외될때 그 결과에 책임을 질수는 없다. 최근 부쩍 늘어나고 있는 집단민원도 자신의 일이면서 정책결정에 소외되고 있는 국민의 반발에 다름 아니다.
민주행정과는 거리가 먼 독선행정은 흔히 행정의 폐쇄성에서 온다. 입법예고제도란 것이 도입되긴 했지만 입안과정에 일반국민의 의견수렴은 외면되고, 그나마도 법령에 국한돼 있어 일반적인 정책에서의 폐쇄성은 여전하다.
87학년도 대입학력고사 과목조정에서 보여준 문교부의 행정스타일은 폐쇄·독선의 단적인 예로 꼽힌다. 발표 하룻만에 고사과목의 수학I이 수학I과 수학Ⅱ-1로 바뀌어야했던 해프닝은 부내관계자도 소외시켜 행정불신을 낳았었다.
대입고사과목을 국가기밀이나 되는듯 보안만 하려다 교육과정 전문부서와 협의를 않는 바람에 잘못 발표를 했고, 정정공고를 하는 과정에 행정의 신뢰성을 잃게 했던 것이다. 대입인문계 고사과목을 수학I로만 했다가 뒤늦게 수학Ⅱ-1도 인문계과정임을 알게된 것이다.
서울시가 목동개발을 지난 84년4월 착공한 이후 2년동안 현지주민들의 1백여회에 걸친 시위를 부른 것도 정책결정과정에 현장사정과 주민의사를 배제한 결과였다. 지역주민의 집까지 1백30만평을 사들여 뉴타운을 건설하려던 서울시는 몰려드는 주민들의 반발에 지쳐 지주·가옥주는 물론, 세입자까지 아파트입주권을 주기로 하고 겨우 공사를 진척시킬수 있었다.
60년대 이후 개발우선정책은 곳곳에서 그 정책의 대상인 주민과 마찰을 빚어왔다. 당사자 입장보다는 3자의 관점에서만 일방적으로 집행하는 행정이 민주행정일수 없다는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정홍익교수(서울대행정대학원·사회학)는 『그동안 우리의 행정이 너무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특권의식으로 군림해 왔다』며 『다소의 무리나 소수인의 불이익쯤은 신경쓸것 없다고 생각하는 관료의식과 이러한 공무원 사회의 분위기가 목동·상계동·대전지역등에서 보듯 행정의 낭비를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행정의 민주화는 공직자가 국민위에 군림하는 독선을 버리고 국민의 공복으로 몸을 낮출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무원이 상관만 쳐다보고 보고용 행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행정의 민주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현대사회연구소가 지난해 공무원 1천5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공무원 의식조사에 따르면 대상자의 59.7%가 「국민에 대한 책임보다 상관의 의중을 살피는데 더 신경을 쓴다」고 대답했다. 또 77.6%가 「주요결정은 위로부터 하달된다」고 답변, 행정의 비민주·경직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정당성은 제쳐두고 상관의 명령에만 맹종하는 풍토에서 책임행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책결정과정의 경직성은 시행착오를 부르고 결과적으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래서 정부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 반복된다.
지난해 5월의 재산세파동은 그 좋은 예다. 세금을 내야할 국민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비주거용건물을 과세대상에 추가해놓고, 이를 내무부로부터 통보받은 시·도는 5개월 뒤에야 전년대비 최고 90%나 오른 세금의 고지서만 불쑥 내밀었다가 거센 반발에 부닥치자 이를 백지화하는 사태를 빚었다.
폐쇄성이나 경직성은 물론 규제만능주의의 획일성 또한 행정민주화를 위해 시급히 버려야할 비민주행정의 타성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해 김포공항폭발물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공공장소의 휴지통을 모두 없애버리는 솜씨를 보였다. 지시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조치가 폭발물사건예방에 얼마나 효율적인 장기적 항구대책이 될 수 있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행정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총무처의 1만4천여 행정기능 가운데 84년에는 44.3%이던 규제기능이 85년에는 53.5%로 늘어나고 있다.
고대 백완기교수(행정학)는 『우리의 행정기능이 민주적 방식에 의해 활성화되고, 행정민주화가 되기 위해서는 이 같은 폐쇄성·경직성·획일성을 뛰어넘어 공직자가 최선의 해답은 이해당사자인 국민의 마음속에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할 때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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