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잠긴 유가족은 고인의 자살 원인에 대해 말을 아꼈지만 호남 지역 미술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광주미술협회 차원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진실을 밝히겠다고 나섰다. 호남 화단이 손꼽는 화가이자 한국 근대 미술의 선구자인 오지호(1905~82)의 둘째 아들로 큰 개인전을 앞두고 있던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일까.
유가족이 밝힌 몇 가지 사실은 전시회와 관련돼 있어 보인다. 서울 갤러리 H에서 열기로 돼 있던 개인전이 해를 넘겨 늦춰지면서 아무래도 화가에겐 부담이 됐던 모양이다. 올 4월로 전시 일정이 잡혔지만 또 연기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고인의 가슴을 옥죄었던 듯하다. 유가족이 발견한 작업 노트에는 이런 괴로운 심정을 기록한 짧은 글이 여러 편 남아 있었다.
고인은 "한정 없이 그림을 더 원하니 이러다가는 내가 당하는구나 싶다"는 표현을 썼다. 지역에 사는 작가이기에 서울 화상(畵商)을 자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서면 계약 없이 전화 통화로만 일을 처리한 점도 고인을 어려움에 빠지게 한 원인이었던 같다. 미술품이 한 인간의 총체가 아니라 환전 값어치로만 계산되는 현실이 그의 우울함을 부추겼을 것이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화가에게 이런저런 불쾌와 불안은 얼마나 큰 돌덩이가 돼 마음을 내리눌렀을까. 갤러리 H는 내년 1월 성대한 1주기 전을 열겠다고 밝혔다. 유가족은 화가가 남긴 작품을 꼭 되찾겠다고 말했다. 세상을 뜬 화가는 말이 없다. 남은 그림이 그 대신 말할 것인가.
정재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