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한 화가를 죽음으로 몬 화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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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슬픔에 잠긴 유가족은 고인의 자살 원인에 대해 말을 아꼈지만 호남 지역 미술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광주미술협회 차원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진실을 밝히겠다고 나섰다. 호남 화단이 손꼽는 화가이자 한국 근대 미술의 선구자인 오지호(1905~82)의 둘째 아들로 큰 개인전을 앞두고 있던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일까.

유가족이 밝힌 몇 가지 사실은 전시회와 관련돼 있어 보인다. 서울 갤러리 H에서 열기로 돼 있던 개인전이 해를 넘겨 늦춰지면서 아무래도 화가에겐 부담이 됐던 모양이다. 올 4월로 전시 일정이 잡혔지만 또 연기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고인의 가슴을 옥죄었던 듯하다. 유가족이 발견한 작업 노트에는 이런 괴로운 심정을 기록한 짧은 글이 여러 편 남아 있었다.

고인은 "한정 없이 그림을 더 원하니 이러다가는 내가 당하는구나 싶다"는 표현을 썼다. 지역에 사는 작가이기에 서울 화상(畵商)을 자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서면 계약 없이 전화 통화로만 일을 처리한 점도 고인을 어려움에 빠지게 한 원인이었던 같다. 미술품이 한 인간의 총체가 아니라 환전 값어치로만 계산되는 현실이 그의 우울함을 부추겼을 것이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화가에게 이런저런 불쾌와 불안은 얼마나 큰 돌덩이가 돼 마음을 내리눌렀을까. 갤러리 H는 내년 1월 성대한 1주기 전을 열겠다고 밝혔다. 유가족은 화가가 남긴 작품을 꼭 되찾겠다고 말했다. 세상을 뜬 화가는 말이 없다. 남은 그림이 그 대신 말할 것인가.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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