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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도 리셋 필요, 정치권은 외교의 탈정치 선언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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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호 3 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연초부터 크게 출렁이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고조되는 가운데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와 관련해 한·중 간 긴장감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방중은 국내 정치권에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6일엔 일본 정부가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항의하며 주한 일본대사의 본국 소환이란 강수를 두면서 한·일 갈등도 증폭되고 있다. 오는 20일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함에 따라 새로운 한·미 관계 정립이란 과제까지 떠안게 됐다. 그야말로 미국·중국·일본·북한발(發) ‘4각 파도’가 동시에 밀어닥치는 형국이다.


문제는 정유년 한국 외교가 시험대에 섰지만 정작 우리 정부는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위기를 관리하고 해결해 나갈 능력도 리더십도 상실한 상태라는 점이다. 정치권도 국익보다는 차기 대선을 앞두고 정쟁에만 몰두해 있는 게 현실이다. 이처럼 한반도 외교안보 지형이 급박하게 변하고 있음에도 국내 정치적 과도기를 맞아 대한민국 외교는 실종 상태에 빠진 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자칫 국익에 중대한 치명타가 가해질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정치적 틈새 노려 실력 행사]
한반도 위기 지수는 새해 벽두부터 높아지기 시작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지난 1일 육성으로 발표한 신년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준비가 완료 단계라고 밝혔다. 그러자 트럼프 당선인은 곧바로 자신의 트위터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강경 대응을 예고하고 나섰다. 북한 미사일 위기는 사드 논란으로 이어졌다. 외교부가 지난 5일 추궈훙(邱國洪) 주한 중국대사를 비공개로 불러 사드 문제와 관련한 중국의 보복성 조치에 항의의 뜻을 전하자 중국 외교부는 같은 날 정례브리핑에서 “한·미 양국이 사드 관련 프로세스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맞받았다.


다음 날인 6일엔 갈등의 불길이 한·일 관계로 옮겨 붙었다. 일본 정부는 부산 일본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항의하며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와 모리모토 야스히로(森本康敬) 부산총영사를 일시 귀국 조치한다고 발표했다. 한·일 통화스와프 협상 중단도 통보했다. 더 나아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이날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과 통화에서 “한·일 정부 간 합의를 역행하는 것은 건설적이지 않다”고 의견을 모았다며 한국 고립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한반도 주변 이해 당사국들이 이처럼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잇따라 강경 대응에 나서는 데는 한국의 국내 정치적 상황을 십분 활용하려는 전략이 깔려 있다는 게 외교가의 공통된 분석이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대통령 탄핵 정국을 맞아 한국 정부가 제대로 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기 힘든 여건이라고 판단한 주변국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의 외교정책을 한번 흔들어보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도 “동북아 정세의 불확실성이 갈수록 커지다 보니 한반도 주변국 지도자들은 일종의 ‘마초이즘’ 유혹에 빠져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경향을 띠기 쉽다”며 “이런 구도에서 한국 정치가 요동치자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실력 행사에 나서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외교가에서는 한국에 차기 정부가 들어설 경우 외교안보 기조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만큼 미리 선수를 치면서 기선 제압에 나서겠다는 의도도 담겨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학계와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이럴 때일수록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중심을 잡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주문하고 있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비록 국내 정치적 여건으로 인해 평상시만큼의 외교력을 발휘하긴 쉽지 않지만 외교안보에는 여야가 따로 없고 시간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며 “지금이야말로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고 여·야·정이 머리를 맞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정치권 모두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는다. 문 교수는 “앞으로는 정부도 시스템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해 놓고는 국민에겐 그냥 따르기만 하라는 사고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며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거치면 외교 협상에도 국민 여론을 무기로 당당히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 이사장도 “외교안보 정책이 탄핵 대상이 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정부가 국민을 믿고 국익만 바라보며 대처해 나가면 주변국들도 ‘아무리 강경하게 나가봐야 한국 국민의 반감만 살 뿐 본전도 건지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서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사회적 합의 거치면 외교 협상서 무기 돼]
정치권의 신중한 대처도 마찬가지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정치권이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 탈정치화를 선언하지 않으면 지금의 위기는 해소되기 힘들 것”이라며 “이럴 때야말로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당과 똑같이 사드 반대 당론을 내세우는 국민의당이 민주당 의원들 방중에 대해 “성과를 낼 만큼 철저히 준비했는지, 준비 없이 갔다가 이용만 당하고 성과만 부풀리는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기 바란다”고 논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란 지적이다.


신 전 대사는 “정부도 입장을 달리하는 야당에 꾸준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그럴 경우 외교 현안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얻기 쉬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교수는 “한반도 위기 관리를 위해서는 이제라도 외교안보 정책의 근본적인 ‘리셋(reset)’이 뒤따라야 한다”며 “민주주의의 핵심은 국민적 합의를 기초로 하는 것이고, 그래야 한 나라의 외교도 힘이 생기는 법”이라고 말했다.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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