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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승일의 시시각각

알파고의 습격은 인공지능 자극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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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홍승일 논설위원

홍승일
논설위원

지난해 3월 이세돌 9단은 구글의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에게 패배한 뒤 “인간이 진 게 아니라 이세돌이 진 것”이라고 바둑팬들을 위로했다. 하나 그로부터 1년도 안 돼 ‘인간’은 지고 말았다.

막강한 SW로 유명 바둑기사들 꺾어
체스도 AI에 패배한 뒤 시장 넓어져

중국의 세계 랭킹 1위 커제를 비롯해 한·중·일 3국 최고수들이 알파고에게 달려들었으나 무려 60전60패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한 판도 건지지 못한 건 충격이었다. ‘인간 연합군’ 중에는 한국의 간판스타 김지석(29) 9단도 있었다. 지난 2일 저녁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온라인 대국이었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치열한 전투바둑으로 유명하지만 제대로 싸움 한번 붙어보지 못하고 170수 만에 돌을 던져야 했다.

-느낌이 어땠나?

“앞으로 만나도 이길 자신이 없다. 더욱 강해질 것이다.”

-뭐가 그리 뛰어난가?

“고수라도 바둑판 중앙은 구름 잡는 영역이라 너무 어렵다. 알파고는 계산이 워낙 뛰어나 귀와 변은 물론이고 중앙 운영에서도 상대를 압도했다. 7, 8초 만에 뚜벅뚜벅 최선의 수만 둬 나갔다.”

-속기(速棋) 말고 장고 바둑이면 되겠나?

“어림도 없다. 다른 프로들 진 바둑 다 들여다봤는데 알파고는 단 한 판도, 단 한 차례도 불리한 국면 없이 시종 무난하게 이겨 갔다.”

알파고에 진 기사 중에는 “인간 최고수들과 두 점 정도 접바둑 실력 격차가 있어 보인다”는 경우가 적잖았다. 기성(棋聖) 칭호를 들은 일본의 고(故) 후지사와 슈코가 전성기에 “바둑의 신과 목숨 걸고 둔다면 몇 점 접바둑이면 자신있나”라는 질문을 받고 “석 점 정도”라고 호언했다. 두 점이라면 신과 인간의 중간 그 어디쯤 있을 것이다. 알파고는 인간의 직관과 창의성을 계산력으로 압도해 버렸다. 일부에서는 알파고의 등장으로 2500년 바둑 역사를 가른다는 뜻에서 기원전(BC, Before Computer), 기원후(AD, After DeepMind)라는 이색 표현을 쓴다(딥마인드는 알파고를 만든 회사 이름이다).

AI 충격은 쓴 약이다. 중국에까지 추월당한 우리 AI 수준을 끌어올릴 자극제로 삼아야 한다. 한국의 AI 기술은, 세계 최고라는 미국의 75% 수준이다. 중국과도 비슷하거나 오히려 뒤지는 형편이다(현대경제연구원, ‘AI 시대, 한국의 현주소’ 보고서). 근래 한국 바둑 국가대표는 국제대회에서 중국에 판판이 진다. ‘IT 강국’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AI에서는 2류로 처질 위기다. ‘돌바람’이라는 국산 바둑AI가 있지만 알파고는 물론 일본·중국의 경쟁 프로그램에 훨씬 뒤진다는 평가다.

그러나 바둑 형세 낙관파여서 그런지 김지석 9단은 의외로 미래를 낙관하는 쪽이었다.

-바둑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 같나?

“계산기나 컴퓨터가 나왔을 때 수학자들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수학과 통계학이 더 풍성해진 것 아닌가.”

-프로기사의 밥그릇이 위태롭지 않을까?

“당장 그럴지 모르지만 바둑의 외연이 넓어지는 효과를 봐야 한다.”

실제로 “좋은 AI 프로그램이 보급되면 바둑을 생업으로 삼는 프로·아마 기사들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질지 모른다”(김효정 3단)는 우려가 있다. 반면 “AI 덕분에 바둑이 동아시아를 넘어 지구촌 곳곳에 급속히 퍼질 것”(감동근 아주대 교수)이라는 기대도 있다. 1997년 러시아의 체스 세계 챔피언이 IBM 수퍼컴퓨터 딥블루에게 처음 패퇴한 뒤 오히려 체스가 전 세계로 급속히 전파됐다.

어느 분야 AI든지 기대와 근심이 함께 다닌다. 국내 바둑인구가 700만 명에 달하기에 알파고 쇼크는 목하 AI 시대임을 온 나라에 각인하는 데 일단 성공했다. 바둑밖에 모르던 320여 명 프로기사들조차 ‘한국판 알파고 개발’을 외치며 TF 구성에 나섰다. 바둑계와 AI가 어떻게 공생해 나가는지 지켜보는 것 자체가 4차 산업혁명에 몸을 실은 우리에게 산 교육이다.

홍승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