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14년 군정에 국민들 진저리|남미의 문민화 바람 장두성 특파원 그 현장을 가다|피노체트독재 타도엔 야 역부족|89년 선거혁명 난망…반정노래 히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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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아르헨티나가 남미 문민화의 첨단을 걷고 있다면 그 정반대의 위치에 칠레가 웅크리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서 온 세계의 비난과 배척을 받으면서도 「피노체트」정권은 프러시아군대의 전통을 옮겨받은 엄격한 군대조직을 바탕으로 89년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향해 무리한 독주를 하고있다.
14년째 엄격한 군사통치가 계속되고 있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분위기는 리베르타도르가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이 압도하고 있다.
73년 쿠데타로 「아옌데」정권이 무너질때까지 칠레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의사당건물은 의회가 해산된 이래 칠레를 포고령으로 통치해온 4명의 군사평의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건물주변에는 누런색 유니폼을 입은 경찰들이 밤낮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고 시민들은 그 옆으로 얼굴도 돌리지 않고 바삐 지나다니고 있었다.
칠레는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장성들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대통령직을 맡았던 아르헨티나·브라질 등 다른 남미국가와는 달리 「피노체트」 한 사람이 혼자서 장기집귄을 하는 1인 독재체제로 굳어져 왔다. 그는 육군참모총장·3군 총사령관 및 대통령이라는 세가지 최고직위를 독점하면서 군림하고 있다. 따라서 군사평의회도 그의 수하에 장악되어있는 이름만의 평의회에 지나지 않는다.
81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된 「피노체트」장군은 89년에 임기가 만료된다.
이 시간표를 두고 칠레국민들은 민간정부가 들어서느냐 군부집권이 계속되느냐, 그리고 군부집권이 계속된다면 「피노체트」가 계속하느냐, 아니면 다른 군인이 들어서느냐에 큰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러나 군사평의회가 만들어 놓은 정권이양 계획은 대단히 일방적으로 되어있다. 즉 대통령 후보는 군사평의회의 구성원인 육·해·공군 사령관과 경찰총장 등 4명이 만장일치로 선출한다. 그 다음에는 이 단일후보를 놓고 가·부로 찍는 국민투표가 실시된다. 여기서 승리하면 90년에 의회선거를 공개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만약 국민투표에서 군부가 내세운 후보가 낙선하면 90년 의회선거때 대통령선거를 공개적으로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89년 선거에서 민간 대통령이 나오기 위해서는 국민투표에서 군부후보자를 낙선시켜야 되는 거의 불가능한 장애물을 넘어야하게 되어있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문민화를 갈망하는 측에서는 89년이 어떤 전기를 제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의 추진력이 민간 정치인에게서 나올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희박하다. 정치의 문민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오랜 정치탄압의 결과로 국민들의 열망을 정치행동으로 결집시킬 단합된 야당운동이 아직 나타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새 정당법에 따라 7개 좌파 및 중도정당들이 등록했고 범야단체로서는 자유선거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지만 국민투표에서 군사정권을 패배시킨다는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활동을 시작할 것인지, 국민투표에 대한 불참운동을 벌일것인지 조차 정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해있다.
그런 상황에서 문민화의 계기가 군사평의회 안에서 나올수 밖에 없다는 절박한 기대가 나오고 있다. 그와 같은 기대는 칠레 군부가 다른 어느 남미군대보다도 직업의식이 강한 조직이기 때문에 정치개입을 체질적으로는 기피한다는 기본 전제를 바탕으로 요즘 군사평의회 위원들이 문민화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발설하고 있는 현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평의회 위원중 해군사령관인 「메리노」제독은 다음 대통령이 민간인으로서 50대 초반의 박력있는 인물이 되어야된다고 외신기자들에게 말했다. 공군사령관 「마테이」장군과 경찰총장 「스탕게」장군도 즉시 이 발언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공개적 발언은 군사 평의회 안에 이견이 있더라도 이를 의부에 드러내는 일이 없던 지금까지의 관행에 비추어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이견이 계속될 경우 89년 대통령후보선정 과정에서 「피노체트」가 탈락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간 정치인과 국민들의 문민화열기에 불을 지를 가능성이다. 군사평의회내의 「피노체트」이외의 장성들도 「피노체트」의 1인 장기집권이 가져올 군부에 대한 피해를 의식해서 그런 이견을 노출시키고 있다면 문민화 노력은 군부내에 강력한 동조자를 갖게되는 것이다.
아직은 추진력을 채 갖지 못한 이와 같은 흐름은 칠레국민들 사이에 넓고 깊게 퍼져있는 군사통치에 대한 거부감이 거대한 수원을 제공하고 있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사에 이름을 밝히지 말것을 미리 당부했고 한칠레대학교수는 밖에서 이야기하기보다 집에서 하는 것이 안전하다며 처음 만난 기자를 자기집에 초청까지 했다.
보다 감상적 차원에서 군부, 특히 「피노체트」대통령 (3군 총사령관 경직) 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나타내는 새 유행어가 있다. 「필로 콘티고」라는 말이다.
「너와는 이제 그만」이란 뜻으로 칠레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애용되고 있는 이 신조어는 2년전부터 크게 히트하고 있는 유행가 제목이다.
이 노래제목은 어느 사이 「필로 딕타도르.」즉「독재자에게 면도날을-.」이란 신조어로 변형되어 산티아고시의 담벼락과 학생들이 뿌리는 전단에 구호로 사용되었다.
군부통치에 대한 혐오감은 보다 분석적 형태로도 나타나고 있다. 보수계인 메르쿠리오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문민정치로의 복귀를 원하는 사람은 67%, 현체제의 개혁을 바라는 사람이 18%, 그리고 군사통치의 계속을 지지하는 사람은 4%뿐이다.
그러나 같은 여론조사에서「귀하의 호·부호를 떠나 실제로 정치가 어떻게 전개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피노체트」대통령이 89년 이후에도 계속 통치할 것으로 믿는 사람이 55%, 그 이전에 그가 물러나리라고 보는 사람은 4%에 지나지 않고 있다.
이처럼 국민의 소망과 현실사이에 놓여있는 엄청난 차이를 안고 칠레는 89년이라는 큰 정치적 분수령을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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