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인 신작시집 『이 어둠의 끝은』김태현 <문학평론가>|고단하나 힘찬 삶의 노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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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활약하다가 뜻밖의 사고로 창졸간에 고인이 된 채광석 시인의 마지막 발표작인 『망향』외 3편과 『노동의 새벽』이후 부득이한 사정으로 활동하지 못했던 박노해가 모처럼 발표한 『안정의 끝』을 비롯하여 풀빛판화시선의 주인공 중 열다섯 시인의 신작을 모은 시집 『이 어둠의 끝』은 그 시인들의 다채로운 삶만큼이나 풍성한 세계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엔 미국에 대한 새롭고 깊은 견해를 날카롭게 형상화한 시, 분단극복이 이 시대의 우리에게 부과된 초미의 과업이라는 것을 뜨겁게 가르쳐 주고 있는 시, 농민과 노동자의 누추하나 꺾이지 않는 삶을 왜곡 없이 그려낸 시, 민주화운동에 매진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아픔과 애절한 바람을 담은 시 등등이 고르게 실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재치 있는 착상이나 언어적인 조작을 통해 적당히 만든 가벼운 시가 아니라 시인들 자신의 고단하면서도 힘있는 삶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절절한 노래라는 것이다. 시인들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시인은 시대의 안테나다. 시가 민족문제의 핵심을 포착하지 못하거나 또는 포착했더라도 시적 밀도가 현실의 긴장을 이겨내지 못할 때 그런 시는 매력을 상실하고 독자의 기억속에서 사라질 것이다.(이기형) 『시의 참된 문학성·서정성은 당대사회를 떠받치고 전진시켜 가는 사람들의 삶을 올바르게 반영할 때 획득되는 것이다』(채광석) 『요즈음 나는 미국이 우리 민족의 주체와 얼마나 가까운가 하는 문제와 어느 쪽이 진정으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시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박몽구) 『분단·외세·민중생존권·5월 항쟁등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도 이 시대 문학인의 사명이다. 그리하여 인간해방의 대평원으로 나아가는 길에 동참하고 싶다.(박선욱) 시인들은 분단되고 비민주적이며 종속적인 우리의 현실이 강요하는 갖가지 수난과 고통의 진상을 이처럼 밝힌다. 또한 그런 현실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희생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시집을 통해 인간화의 험난한 과정에서 느낀 시인들의 분노·고뇌·희망등의 정서를 기쁘게, 또 감동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특히 생산의 현장에서 얻은 느낌과 지혜로 시를 쓰고 있는 박노해·최명자·정명자·김영안의 시는 독특한 힘과 세계를 펼쳐 보인다.
요컨대 이 시집은 민중시에 가해지던 이유 없는 비판을, 이를테면 민중성은 예술성과 공존할 수 없다는 따위의 편견을 깨끗이 씻어주는 모범적인 보기가 될 것이며 민중문학을 평하 하러는, 불순하고 기득권 수호적인 움직임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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