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가 진짜 큰고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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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29」직전의 우리나라 현실을 나는 「벼랑 위에 선 난국」이라고 말한바 있는데, 벼랑 위에 섰던 난국이 이제는 갑자기 안전한 평지로 내려와 있는 셈인가. 신문과 TV에 비친 지난 한 주간은 가히 혁명적 변화의 한 주간이었다. 문공부의 보도지침으로 어느 특정인의 사진 게재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말』지 사건의 공판 보도로써 알고 있었는데, 지난 주간에는 그 특정인의 사진과 얼굴이 신문과 TV를 온통 메우다시피 하였다.
또 금년 들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인 민주당 창당 뉴스를 전하는 TV가 그 당 총재의 얼굴은 안 비치고 뒷 모습만 보여주는 것을 보고 그 TV를 통제하는 자들의 옹졸과 치사함이 가엾게 여겨지기까지 하였는데, 지난주에는 그 TV가 그 총재의 믿음직한 얼굴을 어떻게 열심히 방영하는지…. 신문과 TV에 나타난 그런 변화가 진실로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인지 나는갈 모르겠다.
지난 주초의 안도와 흥분이 차차 가라앉으면서 사람들은 신문과 TV에 나타난 외양상의 변화 이외에 별로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현실 앞에서 뭔가 허전하게 느끼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어떤 불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것 같은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지난 주의 변화가 일종의 명예혁명인것 같은 인상을 주면서도 실은 명예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예혁명이라면 1688년의 영국의 그것처럼 유혈없이 평화적으로 집권세력이 당장 물러나고 새 혁명세력이 즉각 들어서서 제반개혁에 착수해야 하는데, 「6·29선언」은 그런것이 아니고 권위주의 정권이 민주세력에게 민주화의 약속만 했을뿐 현실적으로는 집권세력에도 정치구조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민주주의라는 고기가 손안에 꼭 잡힌 것이 아니라 그물 안에서 뛰고있을 뿐이다. 그물이 엉성해서 고기가 새어나갈는지도 모르겠고 그물위로 뛰어넘어갈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고기가 잡히지 않도록 훼방을 놓는 자들이 있다. 민주주의를 철천지원수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의 수효는 그리 많지 않지만 조직과 돈, 지위와 권위, 대중조작의 도구와 기술을 거의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은 결코 경시할 수 없을만큼 막강하다.
그러나 민주화의 약속을 굳게 믿는다면 허전하거나 불안할 필요가 없다. 한 주일 전에 나는 벼랑 위에선 난국을 푸는 비약은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욕심을 버릴 결단을 하는것 뿐이라고 말한바 있는데, 그러면「6·29선언」은 과연 욕심을 버릴 결단일까? 「6·10」에서 「6·29」까지 불과 20일 사이에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예수님은 새사람으로 중생하는데 40일간의 광야의 기도가 필요했고, 사도 바울은 3년간의 은둔생활이 필요했고 석가모니는 보리수 밑에서 49일 동안이나 고행을 해야 했는데 불과 20일 사이에 1백80도 딴 사람이 될 수 있다니 도시 믿어지지가 않는다.
못 믿는 이유는 또 있다. 역사상 전체적인 권력을 쥔 자가 그 권력을 순순히 내놓은 예를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6·29선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병랑 위에서의 싸움은 자멸 아니면 공멸이라는 것을 깨닫고 싸움터를 평원으로 옮긴 전략의 변경이다. 이 평원에서의 싸움은 병랑위의 격투같이 긴 일발의 순간적인 요인이 승부를 결정하는 싸움이 아니라 쌍방간의 병력과 병기와 지략이 총동원되는 큰 조우전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싸움의 승부는 이미 결판난 것이나 다름없다고들 낙관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가 않다.
『야당할 각오가 되어있다』는 말은 상대방의 전투정신을 해이 시키기에 꼭 알맞은 고도의 심리전술의 용어다. 그리고 이 싸움은 금년중에 결판이 날 단기전으로 보고들 있지만 어쩌면 내년 2월이후에도 계속될 장기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4·19이후와 10·26이후의 실패의 경험이 이제는 국민의 역사적 경험으로 승화되어있는 사실을 양인이 잘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저께의 6개항의 정국운영방안의 합의에서 똑똑히 발견하였다. 그 합의는 양인의 결속의 굳은 의지를 온 국민에게 명시한 동시에 양인의 정치적 경륜과 역량이 상호보완해 갈때는 어떤 난관도 슬기롭게 풀어갈 수 있다는것을 보여준 호례다.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양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이다.
무엇이 이토록 양인을 성숙한 민주적 리더십의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부과 20일간의 돌변이 아니라 지난 반세대사이의 모진 시련과 인고다. 시련과 인고는 창조적인 새인간들을 만들었고 그 새 인간들은 늘 새 역사를 만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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