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다섯 낳아 농구단 만들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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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여자프로농구 우리은행의 외국인 선수 타미카 캐칭(27)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캐칭은 "농구에서, 아니면 인생 전체에서?"라고 되물었다. 인생의 꿈을 먼저 얘기해 달라고 했다.

"아이 다섯을 낳고 싶어요. 모두 사내 아이로요. 그러면 아마추어 농구단을 만들 거예요. 나는 코치를 맡을 겁니다."

농담이 심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진짜"라며 밝게 웃었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통역 박경은씨가 "그럼 나는 뭐하느냐"고 하니 "우리 팀이 잘나가면 프런트를 하라"고 했다.

캐칭은 주위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한국에 처음 온 2003년 설날 즈음이었다. "설날이 뭐냐"는 캐칭의 질문에 팀 동료는 "세배하고 돈 받는 날"이라고 대답해 줬다. 체육관에 박명수 우리은행 감독이 들어서자 캐칭은 넙죽 세배를 하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세뱃돈 주세요. 두 번 하면 두 번 주나요?"

굵은 근육과 고난도 테크닉 등 코트에서의 캐칭은 '남자 같은 선수'다. 그러나 우리은행 동료는 "귀여운 선수"라고 말한다. 언제 배웠는지 한국어로 "언니, 좋아" "조깅해" "스트레칭해"라는 말들을 '용도'에 맞게 써먹기도 한다.

◆ 탁월함=2006 겨울리그 1라운드에서 1승(4패)밖에 올리지 못했던 우리은행은 캐칭 가세 후 3연승을 달렸다. 캐칭은 3게임에서 평균 31득점, 13.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은행은 '캐칭의 힘'으로 2003년 겨울리그와 여름리그를 잇따라 제패했다. 2006 겨울리그에서도 우승을 노린다. 캐칭은 미국여자프로농구(WNBA)에 데뷔한 2002년,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 모두 팀 내 최다를 기록하며 소속팀 인디애나 피버스를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다. 그해 신인왕에 오른 캐칭은 "NBA 마이애미 히트의 알론조 모닝과 일대일로 붙고 싶다"고 말했다. 존경의 의미였다. 캐칭은 '오늘 경기가 마지막인 듯' 최선을 다하는 모닝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

아버지 하비스 캐칭은 NBA에서 11시즌을 뛰었던 농구선수 출신이다. 아버지는 막내딸 타미카에게 농구공을 들려주면서 버릇처럼 한 말이 있다. "코트를 떠나고 싶을 땐 주저 없이 떠나라."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는 캐칭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의 경기'다. 정미라 MBC 해설위원은 "거침없이 몸을 내던지고, 저렇게 열심히 백코트하는 외국인 선수를 본 적이 없다. 아니 한국 선수도 저렇게는 못한다. 기술적인 면도 배워야 하지만 캐칭의 태도를 더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 어울림=캐칭은 인디애나와 캐롤라이나 지역 어린이 농구 캠프의 리더다. 농구 지도뿐 아니라 운영까지 담당한다. 캠프를 잘 꾸려 나가기 위해 한국에서 뛰지 않은 2년 동안 대학원에서 '지도자 및 경영인 과정'까지 수료했다. 2006 겨울리그 1라운드에 팀에 합류하지 못한 것도 농구 캠프를 끝내고 오기 위해서였다. 캠프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캐칭은 나눌 줄 안다. 2003년 MVP에 뽑히자 상금을 우리은행 동료와 나눴다. 봉투에 곱게 담아 한 사람씩 전해줬다. 미국에서도 그러느냐고? 아니다. 한국의 '한턱' 문화를 배운다는 의미였다.

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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