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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리셋 코리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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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연말연시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덕담이 오가곤 한다. 하지만 국가적 혼란이 지속되는 현 시점에서는 복 얘기를 꺼내기조차 쑥스러울 뿐이다. 청와대를 거점으로 한 국정 농단의 방증이 속출하면서 광장의 불길과 함성이 장기화되고 있다. 집단적 분노와 허탈감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아 탄핵 정국의 행로나 결과도 불확실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난국을 국가발전의 통과의례로 받아들이자고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그에 선뜻 동조하기에는 사회적 손실이 엄청나고 마음의 상처도 너무 깊다. 하지만 이제 질서회복에 눈길을 돌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고통의 축제로 일관하기에는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저성장·양극화·북핵·탄핵까지
내우외환 속 중층 위기 겪는 중
광장의 함성 제도권이 받들어
전면적 국가 대개조 앞장서야

오늘날 대한민국은 내우외환의 중층적 위기에 휩싸여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환란 이후의 만성적 경기침체로 우리 경제는 저성장 기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생산활동인구의 감소로 경제적 활력을 되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계급적 양극화나 취업난에 의한 갈등과 불안으로 사회적 단절도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 세계 질서의 고립주의적 퇴행, 고조되는 동북아 패권경쟁에 북핵 문제까지 가세해 세계 속의 한국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특히 세계 10위권을 오르내리는 높은 경제지표와 중하위권을 맴도는 낮은 생활지표 간의 부조화로 한국 사회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낮은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상태로 폄하되기까지 한다. ‘최순실 사태’로 인한 국격 하락까지 감안한다면 요즘 대한민국은 국제경쟁력의 근간을 이루는 경제자본·사회자본·문화자본·정신자본 어느 것 하나 온전치 못한 총체적 부실국가로 취급받아도 별 할 말이 없다. 전면적 수술로 국가를 재정비해야 할 리셋 코리아(국가개조)가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요성을 넘어선 리셋 작업의 시대적 당위성은 지구 차원에서 전개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메가트렌드로부터 가장 잘 포착된다. 1차 산업혁명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경공업 중심의 경제사회적 변혁이요, 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중후반 독일이 선도한 중공업 중심의 과학기술혁명이며, 3차 산업혁명은 20세기 후반 미국이 주도한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정보혁명을 말한다. 그러나 정보혁명의 후속파에 해당하는 4차 산업혁명은 과거 세 차례 산업혁명을 능가하는 막강한 문명사적 돌풍을 예고한다.

첨단 융·복합 기술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기에 예상되는 가장 특기할 만한 사태는 인간중심주의의 퇴조라고 본다. 1~3차 산업혁명까지는 도구나 기계를 개발하고 활용하는 역사의 주역이 단연 인간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AI)과 같은 심층적 학습능력을 갖춘 기계인간이 새로운 행위주체로 대두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류는 인간중심적 사회관이나 세계관을 대폭 할양해야 할 미증유의 시련에 봉착할 것으로 예견된다. 20년 내에 기존 일자리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그 단적 사례라고 하겠다. 이 같은 문명사적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할 수 있는 국가체제의 재편이 무엇보다 화급한 시대적 과제인 것이다.

추격형 혁신 전략이 통용되던 근자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선진국들의 성공사례(best practice)를 베끼고 활용해 짧은 시일에 압축적 성장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구 차원의 치열한 경쟁체제하에 창의적 역량이 보다 중요시되어 가는 탈추격 시대에 들어서면서 모방적 발전 전략은 적합성을 상실하고 있다. 창의적 국가개조 작업을 더 이상 회피하거나 지체해서는 안 될 막바지에 도달한 것이다. 창의성이 가장 크게 발휘돼야 할 대목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이행이 진행된 1980년대 후반 제1차 변혁기와 변별되는 2차 변혁기, 즉 정보사회에서 지능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파생하는 사회체계의 내재적 변화를 적파하고 대응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사적 권력의 망동(妄動)이 촉발한 작금의 국난은 역설적으로 다음과 같은 긍정적 통합 효과를 남겼다. 첫째는 보수언론과 진보언론, 올드 미디어와 뉴미디어가 합세해 이루어낸 여론 통합이다. 둘째는 정치적 견해나 생활의식 측면에서 생각을 달리하던 부모-자식을 한마음으로 묶어준 가족 통합이며, 셋째는 이념·계층·지역·성·종교 등을 달리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분노의 공동체’로 결집시킨 국민 대통합이다. 남은 과제는 이러한 통합적 에너지를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승화시키는 일인데, 그것은 광장에 군집한 이들보다 제도권에 소속된 사람들이 앞장서야 할 책무라고 본다.

누구나 온·오프라인 공론장에서 당당한 발화자가 될 수 있는 개방적 참여의 시대에 광장의 민심은 당대의 문제점을 적발하고 토론하고 비판하는 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제기된 쟁점들을 숙의·조정·정책화해 국가체제를 재정비할 수 있는 제도적 개편 작업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고(高)엔트로피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시대적 미아로 전락할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제도권은 이제 진영 논리의 족쇄를 걷어차고 복된 나라를 향한 국가 재창조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