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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시집『홀로서기』 원재길<시인>|가면의 세계에 홀로선 자유의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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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정윤씨의 시의 세계는 크게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홀로 서기』를 위시해서 시집의 제1부와 제2부, 제5부에 들어 있는 시편들로서 이들시편들은 소설의 경우 「성장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성장시」에 속한다.
『나의 전부를 벗고/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그것 조차/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홀로 서기』중에서)
서정윤씨의 「성장시」는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미성년의 정신적인 풍경을 보여준다.미성년의 눈에 비친 세계는 허영과 과장과 가식의 세계이며 진실을 왜곡시키는 가면의 세계다.
그의 시의 또 다른 부류는 시집의 제3부와 제4부에 실려 있는 시편들이다. 이들 시련들은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세계를 탐색하는 일에 몰두한다.
『코끼리 뼈들을 진주로 바꾸기 의한/위험한 시간,/태양은 아침부터 사막을 만들어 가고/신들의 후계자를 지목하기 위한 모임을 갖는다』(『퇴적암 지층1』중에서)
이 원형적인 세계는 「성장시」에서 등장하는 세계와 강하게 대비된다. 신과 인간의 사이에는 화해와 교감과 균형이 존재한다. 이 조화롭고 단일화된 세계의 흔적을 우리는 『바다의 말』『돌』같은 시련들 속의 자연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를「성장시」속의 부조리한 세계로 전락시킨 힘은 무어일까. 서정윤씨는 『그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주어진 순간부터, 시간을 사용하고 역사와 자연을 지배하는 권리가 인간 몫이된 순간부터 세계는 분열과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홀로 서기』에 담겨 있는 54편의 시는 이처럼 비교적 명료한 틀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적당한 감상과 적당한 페이도스, 적당한 예언적 주술이 곁들여 있다.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의안과 용기와 희망을 건네줄 수 있는 시가 되었으면 좋겠듭니다.』 서정윤씨는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절대적인 명제일 수 있다.
서정윤씨의 시에 있어서 한가지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는 시인의 시적 대상이 적극적인 극복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운명론적인 체념의 대상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우려다. 그러할 때, 『몽둥이를 휘두르며 돌을 던지며 싸워도/어느날 처연히 나의 옆자리에 와 눕는/너는 내 형제』에서 드러나는 관대함은 적극적인 세계 인식의 유보로 간주될 우려가 있으며 『어차피 사는 게 인색이라면/해산하는 아픔으로 아침을 맞자』는 구절 또한 체념과 비약을 통한 대상극복 태도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시인은 말한다.『젊은 날의 사람과 방황의 궤적을 옮긴 시집입니다. 나 자신에게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개인사를 뛰어넘는 보다 넒은 차원의 시, 그런 시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라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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