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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벌 받을 여자’ 장칭,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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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쩌둥 사망 후 체포된 장칭은 반혁명집단 수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2년간 집행이 유예되는 바람에 죽음은 면했다. 선고 직후 두 손에 수갑이 채워지는 장칭. 1981년 1월 25일 오전 9시 18분, 최고인민법원 법정. [사진=김명호 제공]

마오쩌둥 사망 후 체포된 장칭은 반혁명집단 수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2년간 집행이 유예되는 바람에 죽음은 면했다. 선고 직후 두 손에 수갑이 채워지는 장칭. 1981년 1월 25일 오전 9시 18분, 최고인민법원 법정. [사진=김명호 제공]

문혁 초기 저우언라이(왼쪽 여섯째), 캉셩(오른쪽 셋째), 장춘차오(오른쪽 둘째) 등과 함께 마오쩌둥(왼쪽 넷째)과 린뱌오(오른쪽 여섯째)를 맞이하는 장칭(오른쪽 넷째). 1968년 5월 1일 밤, 천안문 성루. [사진=김명호 제공]

문혁 초기 저우언라이(왼쪽 여섯째), 캉셩(오른쪽 셋째), 장춘차오(오른쪽 둘째) 등과 함께 마오쩌둥(왼쪽 넷째)과 린뱌오(오른쪽 여섯째)를 맞이하는 장칭(오른쪽 넷째). 1968년 5월 1일 밤, 천안문 성루. [사진=김명호 제공]

갑자기 전용기 요청하기 일쑤
옷 한 벌 챙기려 비행기 동원
시끄럽다며 선박 운행 중지시켜
가족에게도 인정머리 없는 행동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부인 장칭(江靑·강청)은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머리 손질 혼자 하는 것 빼곤, 주변 사람들을 들들 볶았다.

장칭은 계절에 민감했다. “하늘이 주신 선물을 즐기겠다”며 봄에는 상하이(上海), 여름에는 칭다오(靑島)나 베이다이허(北戴河), 가을에는 베이징(北京), 겨울에는 광저우(廣州), 하이난다오(海南島), 항저우(杭州)에 머물곤 했다.

1970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눈도 자주 내렸다. 비서들은 11월 11일 밤에 있었던 일을 평생 잊지 못했다. 장칭이 벌떡 일어나 간호사를 불렀다. “방금 내가 하이난다오에 있는 꿈을 꿨다. 포근한 날씨에 가는 곳마다 꽃이 만발했다. 땅에는 달고 씨 없는 수박이 널려 있었다. 한입 먹다가 깨어났다. 마오 주석에게 보고하고 하이난다오로 가야겠다. 총리에게 전용기 준비해 달라고 요청해라. 오늘 오후까지 하이난다오에 도착해야 한다.”

비서들은 난감했다. 장칭은 한번 이동할 때마다 짐 보따리가 많았다. 비행기 점검도 시간이 필요했다. 사정 설명하며 내일 떠나자고 했다간 무슨 심통을 부릴지 몰랐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하소연했다.

저우언라이가 장칭을 달랬다. “오전에 전용기 준비하라고 공군에 통보하겠다. 상태 점검하려면 오후 출발은 불가능하다. 안전 보장을 위해 내일 떠나는 것이 좋겠다.” 장칭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지 모른다는 말에 겁이 덜컥 났다. 초조해 하며 하루를 더 기다렸다. 비서가 구술을 남겼다. “장칭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풀밭으로 달려갔다. 하늘 향해 두 눈 감고 팔 벌리더니 나는 부활했다고 외쳐댔다. 새 소리와 꽃 향기가 요란했다.”

해가 바뀌자 장칭은 광저우로 갔다. 대기하고 있던 공군 사령관에게 투덜댔다. “가볍게 걸칠 긴 코트를 챙겨오지 못했다.” 사령관은 옷 한 벌 운반하기 위해 비행기를 동원했다. 장칭의 숙소에선 강을 오가는 선박의 모터 소리가 들렸다. 공군 사령관은 선박 운행을 중지시키라고 지시했다. 멀리 떨어진 조선창에서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은은히 들리자 광둥성 위원회에 호통을 쳤다. “별도 지시 있을 때까지 조선창의 모든 업무를 중단해라.” 가는 곳마다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인정머리도 없었다. 장칭은 언니와 오빠가 한 명씩 있었다. 언니는 한동안 중난하이(中南海)에 거주하며 장칭의 가사를 돌봤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쫓겨난 후에는 아들이 근무하는 칭화대학에 살았다. 이 여인은 가끔 장칭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도 “너를 한번 보고 싶다. 건강 조심해라. 조카 리눠(李納·이납)가 그립다”는 등 한결같았다. 리눠는 마오쩌둥과 장칭의 유일한 소생이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내용도 간혹 들어있었다. 장칭은 편지가 올 때마다 읽어 봤다. 회신은 안 했다. 주변 사람에게도 언니얘기 하는 법이 없었다.

1972년 봄, 리눠가 아들을 낳았다. 리눠는 돈이 없었다. 매달 받는 돈으로는 아이에게 먹일 우유와 보모에게 줄 비용이 부족했다. 중앙 판공청 부주임에게 호소했다. “감히 아버지에게 말할 엄두가 안 난다. 생활이 어렵다는 말 하기도 두렵다.” 판공청 부주임은 평소 리눠를 측은하게 여겼다. 마오쩌둥에게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듣기를 마친 마오쩌둥이 입을 열었다. “얼마를 도와주면 좋을지 네 의견을 말해봐라.” 판공청 부주임은 용기를 냈다. “8000위안 정도면 좋겠습니다.”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한참 생각하더니 답을 줬다. “내 원고료에서 3만2000위안을 인출해라. 장칭, 허즈쩐(賀子珍·하자진), 리민(李敏·이민), 리눠에게 8000위안씩 보내라. 그래야 공평하다.”

전 부인 허즈쩐은 입원 중이었다. 퇴원할 때 3000여 위안을 마오쩌둥이 보내준 돈으로 지불했다. 나머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돌려보냈다. 리눠는 3000위안만 받고 나머지는 은행에 입금시켰다. 허즈쩐 소생인 리민이 어떻게 했다는 기록은 없다. 장칭은 군말 없이 받았다. 남편이 준 돈이라며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깊숙한 곳에 모셔뒀다.

언니에게 관심이 없던 장칭은 마오쩌둥의 병세가 위중하자 언니 생각이 났다. 신임하는 요리사를 불렀다. “언니가 어떻게 사는지 가봐라.” 언니는 강한 성격이었다. 심부름 온 요리사가 부탁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자 손사래를 쳤다. “동생과 조카 리눠가 건강하기만 바란다.”

요리사에게 언니의 근황을 들은 장칭은 마오쩌둥이 준 8000위안 중에서 5000위안을 언니에게 보냈다. 이튿날 맘이 변했다. 다시 뺏으려 하다가 요리사가 말리는 바람에 그만뒀다.

시골 사는 오빠가 아들과 함께 찾아 왔을 때는 국민당 군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만나지 않았다. 경호 책임자 편에 조카에게 줄 카메라 한 대와 녹차 반 근을 보냈다. 마오쩌둥이 권하자 오빠를 만났다.

오빠는 “죽기 전에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 너를 봤으니 내일 떠나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 꺼내 눈물을 닦자 장칭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소문이 퍼졌다. 다들 천벌 받을 여자라며 입을 모았다.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