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민족생활사 백두산(31) 황석영|여명 <제1장>하늘과 대지(3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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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설은 조선 섭정 한배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곧 이어서 말하였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큰 한은 아무나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군사를 보내어 조선 비장으로 하여금 대읍을 수비하게 하며 한편으로는 우리의 자발적인 화백모임을 해체시키고 큰 한을 갈아치운 것은 잘못입니다. 저희 큰 한께서는 북방의 광대한 지역에서 마을 연합의 작은 수장 아들로 태어나셨으나 이들 마을 수장들의 천거를 받아 한에 오르셨던 것입니다. 어느덧 동호를 정벌하고 북쪽 변방의 여러 마을의 힘을 모으더니 각 지역을 맡아 다스릴 한들이 일어서게 되어 이들의 추대를 받아 자연스럽게 큰 한이 되신 것이지요. 저는 또한 오래전부터 청구 호족의 후손으로서 지난번 조선군의 침공 때에 죽은 큰 한을 받드는 박사의 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이 새로운 큰 한을 우리 청구의 바른 승통을 이은 큰 한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청구 큰 한의 바른 승계를 인정해달라는 것이 아니올시다. 다만, 우리 청구의 관경을 침범하지 말것과 다시는 수비군의 비장을 파견한다거나 우리의 화백모임과 장로들의 의견을 짓밟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조선의 관경을 침범하지 않을 것과 큰 한께서 신시 이래로 내려온 검의 자리를 섭정하시는 일이며 고죽에 대하여 우선권을 가지시는 일 등에 관하여는 절대로 참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배의 곁에 있던 우와 다른 상 오가등이 모두들 불쾌한 얼굴이 되었고, 특히 우는 노 하여 얼굴이 붉어지고 눈을 부름뜨면서 허리에 찼던 동검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어디서 알지도 못하던 미개한 짐승이 일어나 큰 한읕 자처하고, 제멋대로 대읍에 쳐들어와 호족들의 질서를 문란시킨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대군을 일으켜 정벌할 것이다. 먼저 너의 머리를 잘라 청구 대읍으로 보낸 뒤에 내가 친히 짓쳐들어가 그자를 내 노예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좋소이다. 여기서 내 모가지야 쉽게 베일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조선은 청구에 대한 그릇된 욕심이 지나쳐서 안에서 일어난 청구백성들의 올바른 소망을 외면하고 사신의 모가지 하나로 구한의 의리를 저버렸다고 천하에서 손가락질을 받게될 것이오. 그러면 저희 큰 한께서는 제 모가지 하나로 다른 여러 부족들과 연맹 할 큰 힘을 얻게되실 것입니다. 자, 어서 내 목을 베시오.
사실 두 손의 손가락처럼 갈라진 각 부족의 지파들 사이에서는 그때마다의 이해 관계에 따라 부족 연합이 이루어졌다가는 깨어지고 하면서도 별다른 큰 분쟁없이 오랜 세월을 보내왔던터였다. 한배와 그의 주변 호족들이 보기에도 이제 조선과 청구는 예와 맥을 뺀 나머지의 다른 부족들과 누가 먼저 그 인심을 얻어서 연맹을 맺느냐에 의하여 힘의 강약이 판가름날것이 뻔했던 것이다. 한배가 손을 저어 우와 설의 날카로운 부딪침을 제지하였다.
우는 진정하라. 그리고 청구의 상께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시오. 만약 지금과 같은 청구의 형세가 하늘의 뜻이라면 백성들이 모두 따르고 받들어서 훌륭한 대읍을 이룰 것이고,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백성들은 이반하게 되겠지요. 우리가 비록 서두른 감은 있으나, 큰 한을 바꿔 세우고 우리의 수비군을 남기고 돌아왔던 것은 그전의 큰 한이었던 자가 다만 몇몇상호들의 호화로운 살림만을 알고 일반 백성들을 침탈하고 빼앗아 원망이 하늘에까지 닿았으며 우리 조선 백성이 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여 관경을 넘어오는 자가 수백에 이르렀소. 그래서 내가 큰 한을 징벌했던 것이고 조선의 수비군이 주둔하게 된 것은 새 큰 한이 호족들의 힘에 눌릴 위험이 있고 상비군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소. 이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니 우리도 자세히 논의하여 이일에 대한 결정을 내릴 것이오. 사자는 나가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설은 곧 밖으로 안내되어 나갔고, 한배는 우와 오가, 그리고 좌우의 상과 더불어 청구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의논을 계속하였다. 우는 분개하여 말했다.
도대체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저들은 그전부터 대읍에 연고가 있던 자들이 아닙니다. 다만 전번 큰 한의 밑에서 박사를 하던 자가 동북 변방으로 달아나 거기서 미개한 마을 연합의 무리들을 모아서 대읍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듣자하니 적은 오천 군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군사를 모은다면 스무 날 동안에 만여명의 군사는 곧 동원할 수가 있읍니다. 지금 일어나려는 저들의 세를 애초부터 꺾어놓지 못하면 나중에 큰 후환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상이 침착하게 말하였다.
대저 힘이 있는 맹수는 힘이 있는 다른 짐승을 잡아먹고 제 기력을 키우는 법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세워놓고 돌아온 큰 한이 백성들의 신망을 얻지 못하고 쫓겨온 것이라면 그 자는 우리에게도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예맥의 강대한 기세를 꺾고 그들을 복속시켜야하는 큰 일을 남겨두고 있읍니다. 뿐만 아니라 서남방에서 난하를 건너 치밀고 있는 제요도당의 세를 막아내야만 합니다. 우리는 먼저 밝종족 내부의 부족지파들부터 하나 둘씩 복속시켜 백성들의 인심을 하나로 모아야만 할것입니다. 청구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나중에라도 인정할 뜻이 계시다면 먼저 우리쪽에서 그를 치켜주고 무마하여 내 사람을 만들고 굳은 결의를 맺고 이를 전하에 알려 그가 등을 돌리게 될 적에는 욕이 그의 것이 되게하며, 이 결의를 헛되이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즉 나의 힘으로 만들어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강화를 맺고 나서 각 관경 인근의 부족들을 통합시키고 그리고는 예와 맥까지도 함께 정벌해야만 됩니다.
상의 말에 한배는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내 생각과 똑같소. 다만 그의 힘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진정한 힘인가를 아직 모르고 새 큰 한이라는 자가 어떤 욕심을 가지고 있는가도 모르오.
또 다른 상이 말하고 연이어 마가가 뒤를 이었다.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섭정께서는 그에게 정식으로 청구의 큰 한을 내리십시오. 허나 이는 반드시 신시의 승통에 따라 단웅 검님의 하명읕 받잡는 형식이 되어야만합니다. 그러한 연후에 그가 힘이 약하다면 우리가 서서히 그 약한, 부분을 메워 나가면서 길들일 수가 있게 됩니다. 또한 만약에 반대로 그의 힘이 생각보다 강대하다면 다른 강대한 부족과의 싸움에 일익을 맡겨 부리고 검으로 하여금 그 전공을 치하하도록 하면 됩니다.
또 그가 어떤 욕심을 가지고있는지 우리 쪽에서 불안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일단청구에서 유와 발족의 힘을 얻어 내부를 평정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인정해 주면서 한편으로는 유족과 발족은 물론이요 이웃의 고죽이나 옥저 진번 임둔 양주등의 부족들에게도 그가 청구의 새로운 큰 한임을 인정하도록 도와줍니다. 유와 발은 이체 청구와 더불어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고는 하나 우리 조선이 고죽과 옥저는 원래부터가 우리 한이 나가서 관리하던 지역이라 신체와 다름이 없으며, 진번 임둔 양주 등등은 예·맥의 압박 때문에 우리에게로 기울고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가 주동이 되어 청구를 일으켜 주었으며 그가 다른 마음을 품고 대적해 온다면 그는 다른 부족연합들로부터 지탄을 받게되고 우리는 그를 다른 부족들과 함께 토멸할 명분이 생기게 됩니다. 우선은 단웅 검님께서 그를 청구의 큰 한으로 인정한다는 문서를 내리게 하시며 그 관경을 이쪽에서 먼저 정하여 줄 일입니다. 그리고 섭정께서는 친히 나가셔서 그를 경하하여 주고 강화의 결의를 맺으십시오. 이제 중요한 일은 예 맥뿐만 아니라 저멀리 천하의 큰 강 두겹을 건너서 있는 동북의 기름진 땅을 점령하여 나아갈 일입니다. 그곳은 일찌기 숙신의 땅이니, 우리가 부족의 힘을 모아 그쪽으로 뻗어 나가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또 다른 여력을 확보해 두는 것은 지금 매우 시급한 일이올시다.
상과 마가의 얘기를 듣고 나서 조선 섭정 한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씀들이오. 이제청구의 큰 한과 양 부족의 관경이 접하는 강변에서 만나겠소. 저쪽의 상 및 오가, 오백의 군사, 그리고 이쪽에서도 같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사흘동안 함께 지내며 여러가지 결의를 맺을 작정이오. 사자를 후대하여 보내도록 하고 청구에서 보내온 예물의 답례로 조선의 누에 실로 짠 가는 비단과 백옥같은 쌀 그리고 구리 거울 한 쌍을 준비하라.
청구의 상겸 박사 설이 돌아갈 제 예물을 가진 조선의 사자가 함께 떠났고 곧 강화에 응하겠다는 전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열흘 뒤에 양측은 약속대로 상과 오기등의 호족들과 친위기 오백씩을 거느리고 양측관경이 닿는 강변에 당도하였다. 덕이 바라보니 난하 유역은 북방 변지의 언덕과 황야와 습지가 많은 척박한 지역과는 달리 너른 평원이 끝 간데없이 결쳐 있었고 땅은 강변의 퇴적물로 기름지고 풍요로왔다. 조선의 누에와 쌀은 일찌기 인근 부족의 부러움이었으며 이것이 조선의 부를 이루었던 터였다. 조선은 일찍부터 신시 이래로 물을 다스리는 법을 알아서 땅을 파서 강의 물길을 바로잡고 둑을 막아 물을 가두는 법이며 물길을 논에 대는 법이며 홍수 때에는 둑을 터서 들판을 알맞게 적시는 법을 갈 알고 있었다. 조선의 오가는 호족들이긴 하였으나 신시 이래의 지혜를 모아서 농사법과, 당을 나누고 징세하는 법이며, 하늘을 살피고 날씨를 아는 법이며 점을 치고 하늘에 제 지내는 법도가 정연하게 이루어져서 각기 분담하였다.
덕이는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뒤에 남는 상 설과 다루가 먼저 나아가 조선측의 좌우 상들과 만났다. 그들은 양측 전사들에게 명하여 강변의 너른 풀밭에 영막을 세우게 하였다. 노천에는 기맹을 걸도록 돌과 흙으로 임시 부뚜막을 만들고 각각의 군사는 양측백장들의 엄격한 통제 아래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갈라져서 각기 숙영할 채비를 갖추었다. 준비가 끝나자 멀찍한 곳에서 쉬고 있던 한배와 덕이, 그리고 그들의 막료들은 함께 나와 가운데서 높직하게 쳐둔 영막 안으로 들어갔다. 동과 서로 나누어 각기 큰 한의 자리를 만들고 주위에 털가죽을 깔아 양측의 막료들이 둘러앉을 수 있도록 하였다. 덕이는 한배와 마주서면서 그옛날 아리강 상류의 광막한 황야에서 함께 하룻밤을 새우고 개명한 고장의 신기한 얘기를 해주던 소년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첫눈에 알아 보았다.·그들은 선채로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읍하고나서 자리에 앉았고 이어서 양쪽의 호족들은 번갈아 상대편의 큰 한에게 삼육의 예를 올렸다. 자리를 정하고 모두 둘러앉은 뒤에 청구의 상설과 조선의 상이 차례로 말하였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그동안 청구가 집안문제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여 조선의 간섭을 받아 왔으며 집안 일로 남의 간섭을 받는 일은 자못 편치못한 일이라, 드디어 우리힘으로 집안을 고루 평안하게 다스리려고 하며 한편으로 조선과는 이웃과 이웃으로서 사이좋게 지내고자 함이니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약조가 공평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조선은 일찌기 신시 이래로 구한의 아홉 지파 가운데 큰 한 중의 큰 한이신 검님을 세워 받들더니, 각 부족이 서로의 관경을 지키며 고유한대로 백성들을 다스리면서도 검님의 뜻에 따라서 하늘의 명을 순종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여러 부족의 살림과 생각에 다른 바가 있어 신시 이래의 승통은 어지럽게 흩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한 종족의 의기를 깨뜨려 왔습니다. 이에 저희 섭정이시며 큰 한이신 한배 큰 한께서는 의로 단웅 검님의 뜻을 받들고 이 어지로움을 바로 잡고자 아홉 지파의 힘을 모으려 하십니다. 청구에 새로운 큰 한이 백성의 뜻으로 일어선 일은 누구보다도 우리 조선이 바라던 바요 또한 구한의 큰 어른이신 검님께서 이 일을 경하하여 마지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환웅 검님의 같은 후손으로서 청구족의 발족과 유족은 물론이요 우리 조선을 비롯한 고죽 옥저 진번 임둔 양주등의 부족들은 모두 함께 청구의 새로운 제도와 질서를 기대하고 있읍니다.
하고나서 조선 상은 한배에게로 가서 소의 무릎뼈에 낙인된 문서를 받아 두 손에 받쳐들고 돌아섰다.
청구의 큰 한은 구한의 검님께서 내리는 하명을 받으시오.
덕이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세 번 큰절을 올리고 다시 나와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다음에 무릎을 꿇고 정좌하였다.
너희 청구가 이제 한과 오가의 위를 정비하고 새로이 몸을 세우려는데 있어, 청구는 본시 환웅 검의 신시 이래로 치우 검님께서 스스로 현신하신 땅이라 그 후손임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나 구한의 검 단웅은 너희 청구의 큰 한을 정하여 주면서 이에 몇 가지를 가르치나니 받들어 백성들을 가르치고 기르도록 하여라. 먼저 다섯가지 가르침을 잊지 말고 다섯가지 일을 시행하라. 속이지말고, 게으르지 말며, 효도와 순종에 위배됨이 없을 것이며, 음란치 말고, 다투지 말라. 하늘에 제를 지냄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이루는 길은 먹는 일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는 사람살이의 근본이요 제사는 다섯 가르침의 근원이라.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그 부족을 편안히 다스릴지니라.
검의 하명이 적힌 소의 무릎 뼈는 곧 청구의 큰 한 덕이에게 전달되었다.
〈그림 강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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