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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연예인이었던 그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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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호 27면

‘메르세데스 소사, 아타왈파 유팡키를 노래하다’ 음반.

상을 받든 말든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의외였다. 물론 그의 노래와 시가 비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또한 오래전부터 노벨 문학상감이라는 이야기도 들어왔다. 학창 시절 클래식음악에 주눅이 들 때도 ‘우리에게도 밥 딜런 같은 사람이 있다’며 자존심을 지키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 세대만 하더라도 외국 음악을 들을 때 유명한 곡이나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노래나 가사를 찾아볼까, 대개는 그냥 듣는다. 음악은 가사를 굳이 몰라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밥 딜런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나는 그의 노벨상 수상으로 최근에는 좀 멀어졌던 1960~70년대의 포크음악에 눈길이 갔다. 서구사회에서 이 시기는 자유와 혁명의 시대였다. 정치적인 자유를 위한 전 세계 시민들의 저항과 인종차별 반대운동, 제3세계의 반식민지운동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의 문화와 사회적 관습들이 모두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속칭 ‘꼰대문화 척결’이 시대의 슬로건이었다. 대중음악계에서도 밥 딜런, 조안 바에즈, 피터 폴 앤 메리 등의 가수들이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사회성 짙은 노래를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흐름이 70년대에 나타난다. 한대수, 양병집, 김민기, 양희은 등의 청년 문화세대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60~70년대의 새로운 시대적 상황을 대중음악으로 가장 잘 반영해 낸 곳은 남미였다. 칠레의 누에바 깐시온,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 아르헨티나의 누에보 칸시오네로 등이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남미의 음악이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우선 민속음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이것을 현대적 음악으로 체화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 상업성에 휘둘리지 않고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민초들의 애달픈 삶과 고통을 위로하려고 했다. 이들의 노래에는 정치색이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서정적인 멜로디에 위로와 격려를 담은 노래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 중에서 오늘 이야기하려는 이는 아르헨티나의 아타왈파 유팡키와 메르세데스 소사다.


아타왈파 유팡키는 본명이 아니다. 아타왈파는 잉카의 마지막 황제의 이름이었고 유팡키라는 것은 ‘먼 곳에서 와서 이야기하다’라는 뜻이다. 이름만으로도 그가 가진 인디오로서의 자긍심과 민초들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음유시인으로서 정체성이 드러난다. 그는 기타 하나를 들고 넓은 초원과 안데스 산맥을 넘나들면서 민속음악을 수집하고 자신의 노래를 만들었다. 스스로 인디오의 후예라고 생각한 그는 경이로운 대자연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사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한숨을 소박한 멜로디로 바꾸었다.


그런 그를 아르헨티나의 군부정권은 좋게 볼 리가 없다. 때문에 꽤 오랜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후배 세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서 남미의 새로운 음악운동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유팡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전설적인 가수가 메르세데스 소사다. 그녀의 음악은 가을 산처럼 품이 넓다. 그녀의 성품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두 팔로 안아주시던 외할머니처럼 온화하고, 마을 앞에 서 있는 당산나무처럼 듬직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소사는 다른 포크 음악가들과는 달리 직접 곡을 쓰지는 못했다. 하지만 모든 노래가 소사라는 너른 품을 지나면 훨씬 더 깊은 울림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비올레타 파라의 ‘삶에 감사해’라는 명곡도 메르세데스 소사의 버전이 더 감동적이다.


그녀의 대표적인 음반 중 하나가 77년에 나온 ‘메르세데스 소사, 아타왈파 유팡키를 노래하다’이다. 선배 유팡키의 노래만으로 음반 전체를 채운 것이니 ‘전설이 전설을 노래하는’ 음반이다. 더 쉽게 비유하자면 ‘양희은이 부르는 김민기의 노래들’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유팡키의 가창은 밥 딜런처럼 개성적이긴 하지만 뛰어나다 할 수는 없다. 그의 목소리는 마른 옥수수 잎처럼 먼지가 날린다. 반면 소사는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여름날 구름처럼 풍요롭고 드라마틱하다.


이 전설적인 음반은 표지부터 범상치 않다. 소사는 인디오 무녀처럼 검은 머리에 소박한 옷을 입고 커다랗고 낡은 북을 들고 있다. 앨범 전체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수록된 곡들은 가급적 음악을 화려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유팡키가 사랑했던 기타와 전통 북, 그리고 몇몇 작은 악기들로 음악을 만든다. 그렇다 보니 소사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거친 흙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소사의 굵은 저음과 안데스산맥을 돌아 나오는 유팡키의 노래가 바람이 되어 시공간을 건너온다. 깊은 위로를 준다. 밥 딜런, 아타왈파 유팡키, 메르세데스 소사. 모두 그 시대의 블랙리스트 연예인이었다는 점을 밝힌다. ●


글 엄상준 TV 프로듀서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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