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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원 들여 첨단 기술 겨루는 6억명의 축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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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호 20면

1 이달 4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몬차에서 열린 F1 그랑프리에서 우승한 메르세데스 팀의 드라이버 니코 로스베르크가 팬들에게 샴페인을 뿌리고 있다.

2 이날 경주에 참가한 22대의 차량들이 일제히 첫 코너에 진입하고 있다. [몬차 AP=뉴시스]

천지를 뒤흔드는 고주파 굉음. 고막이 그토록 처연히 떨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왼쪽 고막을 찢을 듯 뒤흔들어댄 파동은 머리 한가운데를 꿰뚫고 반대편 고막으로 뛰쳐나갔다. 머릿속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이달 4일 이탈리아 북서부 몬차(Monza) 서킷에서 치른 F1 이탈리아 그랑프리 결승 현장에 다녀왔다.


1950년 시작한 이 대회의 공식 명칭은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F1)’이다. 모터스포츠 전문가 강재형과 김재호가 쓴 『F1의 모든 것』에서는 F1을 ‘바퀴가 외부로 노출된 1인승 경주차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벌이는 세계 최정상의 자동차 경주’라고 정의한다. F1은 관중 동원력이나 예산 규모 면에서 올림픽·월드컵과 더불어 세계 3대 스포츠로 손꼽힌다.


F1은 궁극의 자동차 성능을 겨루는 장인 동시에 거대한 국제 비즈니스의 무대다. 현재 페라리와 BMW·메르세데스-벤츠·르노·혼다 등의 쟁쟁한 자동차 제조사들이 각각 연간 4000억 원 가량의 자금을 쏟아 부어 F1팀을 운영 중이다. 또한 300개 넘는 기업이 연간 4조 원 이상의 자금을 후원하고 있다. 특정 대륙에 치우치지 않은 인기 덕분이다. 올 3~11월 전 세계 돌며 21회 경주이 대회의 주최자는 유엔 협력기구인 국제자동차연맹(FIA). 그러나 상업적 권리와 운영권은 민간 기업 FOM이 쥐고 있다. 이 회사의 주인은 버니 에클레스톤. F1의 실질적 소유주다. 그는 동물적인 비즈니스 감각으로 F1을 세계적 흥행 이벤트로 키웠다. 이달 7일 그는 미국 케이블 기업 리버티미디어에 F1 운영권을 4조8000억 원에 팔았다.


한 해 동안 전 세계를 돌며 치르는 F1을 찾는 관중은 400만명. TV로 지켜보는 이들은 6억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12배에 달한다. 올해 기준으로 F1은 3~11월, 전 세계 각지를 돌며 21회 치른다. 우리나라도 2010년 전남 영암의 코리아인터내셔널 서킷에서 F1을 치렀다. 그러나 적자 때문에 2013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긴 상태다.


아직 모터스포츠 문화가 뿌리 내리지 못해 일반인의 관심이 작은 탓도 있었다. 반면 몬차 서킷의 그랜드스탠드는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관중이 가득 들어찼다. 이날 아주 특별한 공간에서 경기를 관람했다. 각 팀이 귀빈을 맞이하기 위해 마련한 패독 클럽이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 동안 연습과 예선을 모두 볼 수 있는 티켓 가격만 500만원 이상이다.


각 팀은 경기를 치르는 전 세계 서킷으로 옮겨가며 패독 클럽을 운영한다. 대개 그랜드스탠드 맞은편 건물의 2층에 자리하는데, 입구에서부터 경비가 삼엄하다. 서비스는 최고다. 이용객은 경기 내내 최고급 요리를 제공받는다. 또한 실내 곳곳에 달린 대형 TV로 경기를 생중계한다. 경기 전과 후엔 해당 팀의 드라이버가 패독 클럽으로 올라와 인사를 건넨다.


사람들이 F1에 열광하는 건 상상을 뛰어넘는 스피드 때문이다. F1 경주차의 최고속도는 시속 350㎞에 달한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가속은 3초 미만에 마친다. 고가의 일부 스포츠카도 이 정도 성능을 내는 경우가 있지만 F1 경주차로선 특히 어려운 도전이다. ㎜단위까지 깐깐하게 못 박은 규정(포뮬러) 때문이다.

올해부터 F1 레이스에 복귀한 르노-인피니티 팀이 제작한 경주차. [사진 르노 모터스포츠]

아반떼 스포츠 배기량에 출력은 4배마냥 크고 강력한 엔진을 얹을 수 없다. 가령 현행 F1 경주차의 엔진은 V6 1.6L 가솔린 터보. 2013년까지 쓰던 V8 2.4L에서 다시 한 번 줄였다. F1 역사상 가장 작다. 그러나 준중형차급 엔진에 전기 모터 2개를 더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으로 875마력을 낸다. 1.6L 가솔린 터보 엔진을 얹은 현대 아반떼 스포츠보다 4배 이상의 출력을 내는 셈이다.


게다가 규정은 갈수록 엄격해진다. 이때마다 각 팀은 규정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 최고의 성능과 효율을 낼 궁리에 바쁘다. 그래서 F1 경주차엔 현존하는 최신 기술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이를테면 가장 가볍고 견고한 소재를 짝짓되 마찰과 저항은 최소화한다. 이처럼 규정과 팀이 치열하게 쫓고 쫓기는 가운데 기발하고 창의적인 기술이 무르익는다.


F1 경주차로 검증한 기술은 양산차에 스며든다. 열에 잘 견디는 세라믹 디스크 브레이크, 고속에서 차체의 들뜸 현상을 막는 공력 설계(에어로 다이내믹), 쇠보다 75% 가벼우면서 강도와 탄성은 7~10배나 뛰어난 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CFRP), 운전자의 시선 이동과 동선을 줄인 스티어링 휠의 각종 스위치가 대표적인 예다.


이번 취재는 르노-인피니티 팀의 초청으로 성사됐다. 르노는 F1에서만 50여 년간 활약한 터줏대감. F1 팀에 엔진을 공급하는 4개 업체 중 하나다. 올해는 직접 팀을 꾸렸다. 함께 손잡은 파트너는 인피니티.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소속의 프리미엄 브랜드다. 인피니티 역시 지난 5년 동안 F1 팀의 후원사로 활약하다 올해는 팀으로 참가한다.


이탈리아 몬차 서킷을 찾기에 앞서 2일 프랑스 파리 인근의 르노 모터스포츠 연구개발센터를 방문했다. 르노 모터스포츠의 대표 제롬 스톨은 “우리 브랜드를 알릴 가장 효과적 수단이라고 판단해 팀으로 복귀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0~2006년 르노삼성 사장을 지냈다.


인피니티에서 모터스포츠를 총괄하는 토마소 볼페 부사장은 “대개 하이브리드라면 효율만 떠올리는데 인피니티의 철학은 다르다”고 말했다. 에너지 회생 기술을 이용해 엔진의 모든 회전 영역에 힘을 더해 성능을 높이는 것이 목표라는 것이다. 그는 “2011년 중형 세단 M35h(현 Q70 하이브리드)로 하이브리드 자동차 가속 기네스 신기록을 세운 게 좋은 예”라고 설명했다.


하이브리드에 대한 인피니티의 접근방식은 시스템의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른바 ‘다이렉트 리스폰스(direct response) 하이브리드 시스템’이다. 인피니티는 F1 결승 하루 전날 이번 취재에 참석한 기자들이 Q50S 하이브리드를 시승할 기회를 마련했다. 우린 밀라노 인근의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2시간여 달리면서 ‘즉각 반응’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4800억원어치 경주차들이 서킷 돌아다음날인 4일 오후 2시 몬차 서킷에 11개 팀, 22대의 경주차가 예선 성적 순서에 따라 2열 종대로 섰다. 경주차 한 대 당 가격이 100억원, 드라이버 한 명의 평균 연봉이 110억원이니 값어치로 따지면 4800억원 이상이다. 여기에 개최권료, TV 중계료, 후원금을 합치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 투입된 풍경이다.


출발 신호와 함께 22대의 경주차가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달려 나갔다. 시작부터 선두다툼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경주차는 초현실적으로 빨라 눈으로 따라가기 피곤할 정도였다. 직선로를 쏜살같이 지날 땐 경주차의 꽁무니가 뾰족해지는 듯한 착시현상을 경험했다. 선수들의 목은 대개 얼굴만큼 굵다. 엄청난 가속과 감속·회전을 목으로 버티는 까닭이다.


길이 5.793㎞의 서킷을 53바퀴 달린 결과 메르세데스 AMG 페트로나스 F1 팀의 니코 로스베르크가 1위, 루이스 해밀턴이 2위를 차지했다. 3위는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제바스티안 페텔이 차지했다. 르노-인피니티 팀은 17위에 그쳤다. 하지만 르노-인피니티 팀은 “앞으로 5년 동안 순위를 높여가겠다”며 오히려 담담한 모습이었다.


이날 몬차 서킷의 패독 클럽엔 인피니티 최고경영자(CEO) 롤랜드 크루거도 함께 했다. 그는 “모든 게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린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인피니티는 결코 운전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피니티의 자율주행 기술은 운전을 대신한다기보다 자신감을 불어넣고 안전을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몬차 서킷의 시상식은 우리의 붉은 악마를 연상시키는 붉은 옷과 깃발의 물결로 뒤덮였다.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 스포츠카 브랜드 페라리의 열성팬들이었다. 3위를 한 페라리 팀의 제바스티안 페텔은 물론 1위를 한 벤츠 팀의 니코 로스베르크도 약속이나 한 듯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실 둘은 모두 독일인이다.


몬차(이탈리아)=김기범 객원기자ceo@roadt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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